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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소설 월드컵(하늘공원 우정의 만남)-2

매트메니저 2006. 6. 10. 20:50

장편소설 “월드컵”

(200자 원고지 133매 분량)

           

(제2장)  

               하늘공원 우정의 만남


                                                  작가  김  우  영


날씨가 쾌청한 어느 날 오후. 국내의 축구인과, 문화예술인, 1653년 풍랑을 만나 표류로 말미암아 네덜란드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제주도에 첫 발을 디딘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의 후손 그린 하멜과 세계의 축구에 거장 히딩크(Guus Hiddink)와 본프레레(Jo Bonfrere) 전 국가대표 감독과 현재의 아드보카트(Dick Advocaat) 국가대표팀 감독이 만났다.

국내 축구인과 문화예술인이 참석하였다. 국내 축구인으로는 통일축구교실 운영자인 시몬 교장을 비롯하여 현역시절 빗장의 수비선수로 마라토너 ‘달림 교수’ 와 ‘까치축구팀의 ’한강감독‘과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지성 知性의 숯돌 ‘길벗 작가’  등 조만간 독일 월드컵을 축하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출국할 사회 각계 분야의 전문가들로 구성된 ‘통일로 가는 축하 공연단‘ 이 함께 하였다.

이번 자리는 아드보카트 한국 축구 국가감독의 요청에 의해서 까치프로축구팀 한강감독의 주선으로 이루어졌다. 요컨대 이름 하여 ‘한국 축구인과 예술인, 네덜란드인과 우정에 만남’의 자리이다. 네덜란드인으로는 ‘하멜 표류'로 유명한 헨드릭 하멜의 직계 후손이자 외항선원 그린 하멜(Green Hamel)과 전 한국 국가대표팀 축구감독인 거스 히딩크와 본프레레 전 감독, 현재 한국 국가대표팀 아드보카트가 자리를 함께 하는 의미 깊은 모임이다. 그리고 외국인 여성중에 홍일점으로 히딩크 감독의 여자친구 ’엘리자베스‘가 동석하여 눈길을 끌었다.

만남의 장소는 까치축구팀 한강감독이 서울 마포 난지도에 자리한 월드컵 공원 내에서 가장 하늘 가까운 곳에 위치한 ‘하늘공원’에 특별히 마련 한 자리였다. 잠시 축구경기가 없는 틈을 타서 양국 축구 지도자가 만나 양국의  축구문제의 접근과 이번 월드컵의 전망 등에 대하여 허심탄회하게 의논하며 술이나 한 잔 하자는 게 모임 취지이다.

이들이 하늘공원은 자연과 천지가 진행되는 생태적 환경을 갖추고 있는 쓰레기 매립으로 형성된 인공적인 땅 이다. 난지도에서 가장 높은 하늘 공원에 올라서면 서울의 사방 풍광이 한 눈에 펼쳐지는 곳이어서 한강감독이 오늘을 위해 미리 특별하게 자리를 점 찍어 둔 곳이다.

하늘공원은 북쪽으로는 북한산이 장엄하게 들어오고, 동쪽으로는 남산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그리고 늘푸른 한강가에 노을빛 따라 익는 은빛의 63빌딩이 있고, 남쪽으로는 한강이 유유히 흐르며, 서쪽으로는 행주산성이 보이는 천혜의 전망대이다.

이런 훌륭한 조망조건을 살려 서울시는 경사진 면에 전망대를 마련하고 이용자들이 쉬고 머물 수 있는 편의시설을 설치했다. 공원 바깥쪽은 비교적 안정화가 많이 진행된 곳이어서 시민들이 그늘에서 쉬어갈 수 있도록 참나무와 같은 교목을 많이 심었다.

오늘 특별한 이 자리에 또 의미깊은 술이 동원되었다. 히딩크가 특별하게 주문해온 ‘하이네켄 맥주’가 그 주종이다. 이 술은 히딩크가 고향에서 주문해왔다. 그의 고향은 독일과 접경 지역 네덜란드 동부 히딩크의 고향 마을 파르세펠트 히딩크 다이크(히딩크 거리)이다. 이곳에는 200년이 넘는 피에르체(작은 깃털)라는 펖 주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직접 공수해온 술이 바로 하이네캔 맥주이다.

  또 국내 각지의 명주가 모아졌다. 길벗작가가 준비해온 충남 아산의 민속주 ‘연엽주’는 연엽과 연근으로 담은 왕가 王家 의 술이다. 그는 술병을 흔들어 보아며 자랑한다. 백제의 술로 잘 알려진 충남 서천의 ‘소곡주’ 는 온동 평론가는 고향을 다녀오며 가져왔다고 한다. 이에 빠질세라 한국 인삼의 고장 금산의 ‘인삼주’ 는 통일축구교실의 시몬 교장이 가져왔고, 슝 교수도 고향의 술이라며 충남 논산 벌곡의 ‘가야곡 왕주’를 준비했으며, 늘손지 시인이 고향 근처의 명주라고 전북 김제의 술 ‘송순주’를 한 병 가져와 맛깔스럽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남자가 이 술을 마시면 요강단지가 엎어진다는 전북 고창의 ‘복분자주’를 늘풀든 체육관장이 준비해왔고, 배앓이 좋다는 ‘고졸이’라는 홍주 紅酒 를 류통일 전위예술가는 가져왔는데 아끼는 후배인 전남 진도의 섬글 소설가로 부터 진상을 받아왔다며 좋아했다.

또 샤갈 시 낭송가는 부산의 ‘산성막걸리’를 막걸러 가져왔고, 대금연주의 1인자 고운소리는 ‘안동소주’를, 달림 교수는 고향 충북 청주의 ‘청명주’를 가져왔다.

강원도 산골만을 고집하여 터전을 일구며 사는 안고랑처사는 평창의 ‘율무주’를  허리에 한 병 차고 나타났으며, 평생 구름을 머리에 이고 산다는 이고선사는 강원도 ’감자술‘을 왔으며, 강원도 동해시에서 젊은 청춘을 불사르었다는 솔다 시인은 ’옥수수술‘을 가져왔으며 서울이 고향인 금이 시낭송가는 문배주를 준비했고, 한강감독은 17살 일곱선녀가 혀로 이슬처럼 방울방울 뱉어놓았다는 인천의 앞바다의 ’칠선주‘를 준비해왔다.

네덜란드의 하이네캔 맥주를 포함하여 한국의 각 지방 명주가 다 모이니 마치 주류백화점을 이룬듯 하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전국에서 올라온 각종 산해진미의 술안주가 즐비히다. 숙이 동화작가는 전남 영광의 ‘굴비’ 한 두릅을 가져왔으며 고운소리의 시낭송가는 고향 전주의 장군주와 함께 ‘ 사슴불고기’ 를 이바지 형태로 가져왔고, 디엠젯 기자는 경기도 포천의 이동막걸리와 함께 ‘이동갈비’를 찜해왔으며, 별그늘 화가는 고향 충남 공주의 ‘생밤’을 준비하고, 어진 환경운동가는 충남 서천의 ‘도토리묵’을 가져왔으며, 사진작가 대가는 충남 당진에서 ‘쭈꾸미’ 와 ‘실치회’ 를 맛깔스럽게 떠 왔다.

이처럼 다양한 명주와 산해진미를 앞에 놓으니 오늘 모임을 주선한 ‘한강 감독’ 이 건배사를 제안한다.


“자, 여러분 오늘은 이 세상에서 아주 특별한 날 입니다. 서로 만나 반가웁고요, 이번 독일 월드컵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건배를 합니다. 제가 ‘2006 월드컵 성공을 위하여 부라보’ 하면 여러분은 ‘월드컵 코리아 빅토리’ 를 외쳐 주세요.”


“2006월드컵 성공을 위하여 부라보!”


“월드컵 코리아 빅토리!”


“와----박수----”


이쯤하여 술에 관하여는 국. 내외를 일찍이 평정하였다는 술나라의 황태자 길벗작가는 일어서서 그 특유의 힘찬 권주시를 외친다.


“자, 오늘은 의미 깊고 좋은 날 입니다. 명색이 국내의 이름난 축구인과 문화예술인, 세계 최강의 축구 명장들이 모였는데 그냥 말수 없지요. 제가 멋진 권주시를 읊조리겠나이다.”


그러자 일동은 좋아한다.


“아무렴 하세요. 한 수 부탁 합니다.”

“그래요 좋지요! ”


천하가 내 발 밑에 있고

미인이 또한 내 옆에 있으니

옥황상제 부럽지 않아라!

내가 술을 좋아하고

술 또한 이 몸이 따르니

이 또한 금상첨화라.

주모!

오늘 술값은 외상이오!


                                         -- ‘술나라’ 중에서



“오우---역시나 김삿갓 후예답소이다.”


“허허허--- 하하하---”


술잔을 든 온동 평론가가 차분하게 말을 한다.


“오늘 한강감독님 배려로 의미깊은 만남의 날을 함께 하고 있는데요. 네덜란드와 우리나라의 인연은 400여년 전 부터 이미 시작이 됩니다.”


그러자 늘손지 시인도 말을 한다.


“우리나라를 서양에 처음 소개한 분이 바로 계신 그린 하멜의 선조 헨드릭 하멜이고 지난 히딩크 감독님, 본프레레 감독님, 아드보카트 감독님에 이르기까지 네덜란드 감독 춘추전국시대를 맞은 느낌입니다.”


일명 독일통이요, 축구에 관한한 아는게 많은 달림 교수는 아드보카트와 네덜란드 축구에 대하여 일장연설을 한다. 논리정연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네덜란드는 수 천, 수백 년 동안 해양무역국의 피를 이어받아 도전과 응전을 즐기며 개방적인 상인정신의 토털 사커로 무장했단다. 현재 아드보카트 사단을 살펴보면 이렇단다.

그를 그림자처럼 따르며 받쳐주는 베어벡 코치의 `선수 X파일` 장사밑천 활용, 과감한 기용과 경쟁 시스템으로 신화에 도전은 오늘날의 아드보카트를 창조해낸 지략가란다.

170㎝가 될까 말까한 키, 딱 벌어진 어깨, 동글동글한 얼굴형, 유머러스하면서도 다혈질적인 성격의 58세, 네덜란드 출신이다. 네덜란드 대표팀과 PSV 에인트호벤(네덜란드), 글래스고 레인저스(스코틀랜드) 등에서 사령탑 맡았다. 그러다가 한국 축구의 기술위원회의 요청으로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 한국을 이끌어 낼 아드보카트 감독으로 어피일 된 것이다.


이때 앞에 앉아 있던 아드보카트 감독은 어색한지 헛기침을 한다.

“흐흐허험----흐흐허험----”


달림 교수의 아드보카트의 칭찬이 이어지자 한강감독이 적극적으로 칭찬하며 힘을 실어준다.


“우리 한국 축구의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가 ‘한 번의 기적’으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세계의 강자’로 다시금 인정받게 될 것인지 애오라지 그대에게 달렸소이다! 허허허---”


함께 있던 일행들도 박수를 치며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맞아요. 우리 독일 월드컵은 오로지 아드보카트 감독님의 손에 달렸소이다. 박수 짝짝짝---”


이제 통일축구 교실의 시몬 교장이 전문가 답게 말을 이어간다.


  일단 아드보카트의 스타트는 좋았단다. 2005년 8월 우리나라에 온 아드보카트는 3개월 만에 세 차례의 A매치 경기에서 2승 1무의 성적을 올렸다. 상대는 이란, 스웨덴, 세르비아몬테네그로. 하나같이 2006년 독일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강팀을 차례로 눌렀기 때문이다. 지난 2002년 월드컵에서 국민을 감동시켰던 불꽃 투지와 끊임없이 상대를 괴롭히는 체력이 끝내 이기고야 말겠다는 정신력이 돋보였다는 게 시몬 교장의 이론이다. 지난 2002 월드컵 이후 한국 축구님 감독을 맡았던 코엘류, 본프레레 감독 시절에 지지부진하던 실력들이 스믈스믈 연기처럼 생생하게 살아난 것이다.


시몬 교장의 말에 머쓱한지 앞에 앉아있던 본프레레가 소갈머리가 없는 머리를 긁적인다. 그러자 시몬 교장이 웃으며 말한다.


“그렇다고 이 자리에서 본프레레 감독님을 앞에 두고 면박을 주자는 것은 아닙니다. 이해해 주세요. 감독님.”


그러자 이번에는 달림 교수가 앞에 있던 하이네캔 맥주를 시원하게 들이키고는 말한다.


“히딩크 선생, 당신은 부모님을 잘 만났잖소! 아버님 헤레트 히딩크는 파르세펠츠팀의 레프트 윙 선수로 뛰었고, 어머님 요프 여사도 수영선수로써 스페인에 원정을 다녀올 만큼 대단한 스포츠 맨 이지요. 어디 그 뿐이요. 아들 6명에게 모두 축구를 가르쳐 3남인 당신과 5남 르네, 6남 카렐 등 3형제를 프로 축구인으로 만들었잖소. 요컨대 발로 차는 운동을 잘해서 말 입니다. 이런 점도 네덜란드인의 뛰어난 축구기질로 보아도 됩니다.“


히딩크와 아드보카트를 유심히 바라보던 길벗 작가는 말한다.


“제가 우리나라 월드컵 축구대표팀 감독들의 리더십 유형을 살펴 보았어요.

움베르투 코엘류 감독님과 요하네스 본프레레 감독님이 왜 실패했을까? 이들은 한국 축구 정보에 어두었어요. 부임하기 전에 치밀한 분석과 장기 플랜이 없었다는 얘기 입니다. 유능한 참모도 없이 낯선 이  한국 땅에 혈혈단신으로 들어왔어요. 이러니 선수와 한국의 코칭스탭진과 축구협회, 언론 등과 원할한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질리가 없지요? 지난 포르투갈의 코엘류 감독님은 유능한 덕장이었어요. 그러나 중국 삼국지의 ‘제갈공명 없는 유비’ 같은 형국이었지요. 또 오늘 여기 계신 본프레레 감독님은 주변의 조언이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는 중국 삼국지의 ‘원소’ 같은 돌출형 인물이었어요. 반면에 ‘심리전의 명수’ 히딩크 감독님은 ‘조조’ 와 같은 지장이었어요. 또 여기 계신 아드보카트 감독님은 실용적인 ‘손권형’으로 볼 수 있어요.“


옆에 있던 있던 늘손지 시인과 늘풀든 관장이 딱맞는 분석이라며 웃는다.


“맞아요. 길벗 작가님의 분석이 옳아요.”


“그럼요. 적절한 판단의 분석이예요. 하하하---”

그러자 히딩크는 고맙다는 듯 일어서서 인사를 한다. 반면 본프레레 전 감독이 인상이 찌그러진다. 그러자 슝 교수가  논산 고향에서 가져온 가야곡 왕주를 따라주며 위로한다.


“감독님 다 지나간 일 이예요. 그냥 길벗 작가가 분석해본 말이니 너무 개념치 마세요.”


  “으음 . . . . . . 쳇!”


이제는 사진작가 대가는 당진에서 가져온 실치회를 권하며 달랜다.


“어쨋튼 수고했어요. 본프레레 감독님. 이제 같은 네덜란드 출신의 아드보카트 감독이 잘 하니까요.”


대금연주자의 고운소리가 안동소주를 히딩크 감독에게 따라준다.


“조조 감독님 술 한 잔 하세요. 허허허---”


그러자 옆에 있던 별그늘 화가는 공주는 고향 공주에서 가져온 밤을 까서 입에 넣어준다.


“자, 이 맛있는 공주밤을 드세요. 조조감독님, 2002년 우리나라를 월드컵 4강에 올려주시어 감사합니다.”


“어이쿠 감사합니다. 예, 감사합니다.  So Long korea! (다시 봅시다)"


한강감독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아드보카트 감독과 히딩크감독은 네덜란드 출신이다. 네덜란드 상인 商人 정신의 관점에서 두 사람의 리더십을 설명할 수 있다. 이를 보고 어떤 축구인은 성급하게 이렇게 말하기도 한단다. 이것은 바로 ‘토털사커’의 야전 사령관들, 곧 네덜란드 출신 감독들의 전성시대가 개막되고 있다고 말이다.

2005년 12월의 월드컵 조 추첨 이후 유럽축구연맹(UEFA)은 홈페이지를 통해 이런 기사가 나왔다.


“32개 출전국 중 무려 4개팀의 감독이 네덜란드 감독이다. 이들의 네덜란드식 전술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는 것이다. 그 네 명은 딕 아드보카트(한국), 거스 히딩크(호주), 마르코 반 바스텐(네덜란드), 그리고 레오 베인하커(트리니다드 토바고) 감독 등이다. 이 밖에도 90여명의 네덜란드 축구 지도자들이 지구촌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으며 특히 스페인 리그 바르셀로나의 프랑크 라이카르트와 잉글랜드 리그 토튼햄의 마틴 욜은 현대 축구의 흐름을 주도하는 인물로 꼽힌다. 그러면 왜 하필 세계의 많은 축구지도자들 가운데 네덜란드인가? 4개국의 대표팀 감독을 배출한 것이 우연일 뿐인가?”


이를 보고 네덜란드 축구감독협회장 레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네덜란드인은 다른 문화에 쉽게 적응하며 도전을 즐기고 매우 창의적이다. 자신의 축구철학을 선수들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는 능력과 풍부한 야전경험, 열린 사고방식이 바로 네덜란드 감독들의 힘이다.”


네덜란드 속담에 ‘하나님은 지구를 창조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만들었다’는 게 있다. 이 말에 오늘의 네덜란드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들은 육지가 해수면보다 낮은 태생적인 한계를 극복하여 오늘날의 부국으로 성장하였다. 미래에 대해서는 도전적이되 일상생활에서는 검소하고 근면한 태도가 오늘의 네덜란드를 가능하게 한 힘이다.

우리가 흔히 네덜란드는 풍차와 아늑한 전원풍경의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그 풍차는 육지로 끝없이 밀려드는 물을 강으로 퍼내는 동시에 네덜란드인이 살아가는 인내요, 삶의 버팀목이었다. 그 풍차는 압도적인 위력을 지닌 자연과 맞싸워 삶의 근거지를 확보하고자 했던 네덜란드 국민의 저력이자 거룩한 삶과 생존의 바탕이다.

네덜란드 리누스 미헬스 감독이 창안하고 요한 크루이프가 실전에서 증명하였던 ‘토털사커’ 는 바로 이같은 도전과 창의의 결정체인 것이다. 국제적 항구도시 암스테르담이 근세 이후 지속적으로 유럽 문물을 수렴하고 확산했던 것처럼 리누스 미헬스와 그 후예들은 세계 각 나라의 축구 스타일을 융합하여 토털사커를 창조해내고 있다는 것이 달림교수가 지적하는 네덜란드 축구의 전설이자 현실이란다.

네덜란드인이 세계 축구의 핵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가 있다. 다른 국가의 문화와 역사에 대한 관용과 이해력이다. 그들이 원천적으로 다른 나라 사람에 비하여 유달리 착하거나 이해심이 높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생물학적 유전자가 그렇다기 보다는 역사적 경험이 그들의 자유로운 관용을 가능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예리한 분석의 분석과 평론가로 정평이 나 있는 온동 평론가는 이 부분에서 힘주어 말한다.

“여러분, 우리는 이런 점에서 두 가지를 유의해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는 네덜란드가 13세기경부터 자유로운 상공 활동 및 시민적 권리를 지키기 위한 도시법에 의하여 도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국제도시 암스테르담이 낮은 땅의 지대로 인한 지방의 중개무역 중심지로 떠올라 앞으로 수백 수천년 동안 유럽 중상주의 重商主義 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점 입니다. 유럽이 농업 중심의 중세시대를 끝내고 산업 중심의 근대 도시시대를 개막하였을 때 암스테르담은 물적·인적 자원의 집산처이자 교류지였어요. 따라서 세계의 모든 것이 수렴되고 확산되는 중심지 였어요. 21세기에 들어서도 암스테르담의 스키폴 공항은 세계 물류의 중심지 허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은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400여년 헨드릭 하멜이 우리나라 제주 땅에 발을 내딛는 것과 그의 후손 그린 하멜이 오늘날 이렇게 한국에 오고 히딩크 감독과 본프레레, 아드보카트 감독의 줄줄이 이은 내한 來韓은 양국이 보통 인연이 아닙니다.”


일동은 맞다며 박수를 친다.


“그래요. 맞아요!"

"400여년 전 헨드릭 하멜이 ‘하멜 표류기를 써서 우리나라를 서양에 알렸듯이 이번 월드컵에서는 그 하멜의 후손인 아드보카트 감독이 한국을 월드컵 승리국가로 만들어 온 세계에 알릴 차례 입니다.“


“오호 맞아요. 부탁합니다. 아드보카트 감독님!”


이쯤해서 한강감독이 말한다. 여러분 이제 잠시 쉬어가는 의미에서 오늘 참석한 샤갈 시 낭송가의 시를 한번 들어보면 어떨까요?“


일동은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그래요. 좋아요. 부탁 합니다. 샤갈 선생님.”


  그러자 샤갈이 나와 인사를 한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너무 진지한 나머지 분위기가 너무 무게를 싣는 것 같아 한강 감독님이 저한테 시간을 주신 것 같습니다. 마침 오늘 모인 자리가 하늘공원이니까 박두진님의 제2 시집에 수록된 ‘해’ (1949. 5. 15)를 낭송해 드리는데요, 이 시는 인간의 영혼과 생명의 근원인 ‘하늘을 시화’ 한 작품 입니다.”


            하       늘


                                    시. 박두진 朴斗鎭


하늘이 내게로 온다.

여릿여릿

머얼리서 온다.


하늘은. 머얼리서 오는 하늘은

호수처럼 푸르다.


호수처럼 푸른 하늘에

내가 안긴다. 온 몸이 안긴다.


가슴으로, 가슴으로

스미어드는 하늘

향기로운 하늘의 호흡.


따가운 볕,

초가을 햇볕으로

목을 씻고,


나는 하늘을 마신다.

자꾸 목말라 마신다.


마시는 하늘에

내가 익는다.

능금처럼 내 마음이 익는다.



히딩크 감독이 고요로운 샤갈의 시 낭송에 반했는지 일어서서 반가워 한다.


“아하 참 좋아요. 한국인의 정서를 참으로 정적 情的이며 휴매니즘이 듬쁙 베인 작품이예요.”


이번에는 본프레레와 아드보카트가 덩달아 웃으며 말한다.


“나도 참 좋아요. 한국의 시가 이처럼 정감이 있을 줄이야! 하하하---”


“그래요 좋으네요.”


그러자 금이 시 낭송가는 일어나 말을 한다.


“예전에 소식을 들으니 히딩크 감독님이 잘 다니는 강남의 `원스 인 어 블루 문‘ 재즈 바에서 노래 ‘마이 웨이’를 잘 불렀다는데 우리 한 번 이 기회에 들어볼까요?”


고운소리 김주대 대금연주가와 안고랑처사가 반갑다는 듯 박수를 치며 연호한다.


“그래요, 우리 한번 들어봐요.”


“우우우---히딩크 감독님 노래 부탁해요. 하하하---”


히딩크 감독의 여자친구 엘리자베스가 함께 일어서 박수를 쳐준다. 그리면서 히딩크에게  말 한다.


“히딩크. 예전에 강남의 `원스 인 어 블루 문‘ 재즈 바에서 드럼 연주했잖아요. 그 때 불렀던 노래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웨이’를 해요.”


히딩크는 친구 엘리자베스가 옆에서 곡목을 챙겨주자 고맙다는 듯 노래를 시작한다. 일행은 일어서서 기립 박수를 보냈다.


“짝짝짝--짝짝짝--”

“웰컴 거스, 히딩크!”


                                My way


                                                            ‘Frank Sinatra



And now the end is near / and so I face the final curtain / My friend, I'll say it clear/

I'll state my case of which I'm certain//


I've lived a life that's full/ I travelled each and every highway /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Regrets, I've had a few / But then again too few to mention / I did what I had to do/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I planned each chartered course /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way/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 I did it, my way//


Yes there were times I'm sure you knew/ When I bit off more than I could chew/

But through it all when there was doubt//


I ate it up and spit it out / I faces it all and I stood tall / And did it my way /

I've loved, I've laughed and cried// 


I've had my fill, my share of losing / And now as tears subside I find it all so amusing / To think I did all that and may I say not in a shy way//


Oh, no, oh no not me / I did it my way / For what is a man, what has he got/

If not himself then he has naught//


To say the things he truly feels/ And not the words of one who kneels/

The record shows I took the blows and did it my way//


Yes, it was my way//


                                      --  ‘Frank Sinatra’  ‘ My way’



지금 종말이 눈앞에 다가와 / 인생의 마지막 길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내 친구여, 명확히 말해 두겠소 //


확신을 갖고 내 입장을 밝히고 싶소/ 나는 인생을 충만하게 살아왔고/

모든 길을 다 가보았소//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 이상으로/ 나는 내 인생을 걸었다네./

후회는 조금 있소//


그러나 말 할 수 있을 대단한 것은 아니네 / 나는 내가 해야 할 일을 했고

달아나지 않고 예외 없이 다 했다네//


적혀있는 코스는 모두 시험했지/ 옆길도 조심스럽게 걸었지/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 이상으로//


나는 내 길을 걸었네 / 네, 당신도 알다시피/  삼키지 못할 것을 물어뜯은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의심스러울 때는 / 그것을 다 먹고 내뱉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직면하고 기꺼이 맞서 / 내 길을 걸었네 / 사랑도 했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지 / 난 만족감도 얻었고, 좌절도 겪었지//


그러나 이제 눈물을 거두니 모든 것이 우습기만 하군/ 내가 그 일을 했다니/  절대로 소극적이지도 않았습니다/ 아니요, 난 아니오 //


난 내 길을 걸었소 / 인간은 무엇 땜에 있는 것인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자기 자신을 지키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얘기할 수 있어야 해 / 비굴한 말을 하면 안되고/

온갖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내 길을 걸었다고 기록돼있어/ 그래.  그것이 나의 신생이었네//

                           -- ‘프랭크 시나트라’ 의 노래 ‘ 나의 길’ 전문



노래가 끝나자 숙이 동화작가와 디엠젯 기자가 박수를 치며 환영한다.


“오우케이--”

“짝짝짝-- 짝짝짝-- 짝짝짝-- ”

“히딩크 감독 멋쟁이 ”


  박수가 끝나자 한강 감독이 일어서서 말한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이 바로 ‘마이 웨이’ 입니다. 우리의 길 축구로 가는 길 입니다. 감사합니다. ”


  과거에 음악다방 DJ 출신인 길벗 작가이다. 히딩크의 노래가 끝나자 반가웁다는 듯 말한다.


“이 노래는 세계적인 톱 싱어로써 팝 뮤직의 제왕 등 세인으로 부터 끝없는 찬사를 받았던 프랭크 시나트라가 1969년 초에 히트시킨 곡 '마이 웨이(My way)'란 노래입니다. 이 노래는 만든 폴 앙카가 직접 불렀지만, 훗날 프랭크 시나트라가 다시 불러 그의 대표적인 노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중후한 목소리로 불러진 이 노래는 지난 30년 동안 세계의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습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우리나라를 4강의 신화로 만들어 주신  명장 거스 히딩크 감독님이 오늘 수고했어요. 큰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온동 평론가는 말한다.


“자, 이제 잠시 쉬어가는 의미로 400여년전 우리나라 제주도에 첫발을 딘 헨드릭 하멜의 직계 후손인 그린 하멜의 얘기를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외항선원인 그린 하멜은 선조 헨드릭 하멜의 영향을 받았는지 하급 선원으로 각국의 항구를 다니었다. 그때마다 한국을 비롯하여 동. 서양 각국의 문물을 기록하는 전기 작가이다. 그린 하멜의 말이 시작된다.


그린 하멜은 히딩크의 고향 마을 펖 주점에서 가져온 하이네캔 맥주를 눈물처럼 마시며 눈물로 전하는 선조인 헨드릭 하멜의 한국에서의 생활은 대략 이러했다고 전기작가 답게 소상하게 전하고 있다.


1653년(효종4년) 8월15일 밤.


삼방산이 바라보이는 제주도 대정현 大靜縣(남제주 안덕면 대평리. 추사 김정희 유배지)의 앞 바다. 강하게 몰아치는 비 바람 속에서 이미 구멍이 뚫린 난파선 한 척이 파도 위에 하늘거리며 표류하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서른 두 명의 이국의 기진맥진한 사내들이 이곳 해안에 상륙했다. 본래 배에 타고 있던 예순네 명 가운데 ‘운명의 밤’을 넘긴 선원들이었다.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을 비롯한 생존 선원들은 네덜란드 상선 ‘스페로 호크(Sparrow Hawk)’ 를 타고 인도네시아를 떠나 대만을 거쳐 일본의 나가사키로 항해하는 길 이었다.

표류한  이틑날인 8월17일 아침. 해변에 있었던 하멜 일행을 수 많은 조선 사람들이 에워쌌다.


“워매, 저 사람들이 다 무엇이여?”


“글쎄, 저 파란 눈에 높은 코 가 이상한 사람들이네?”


  이어 하멜 일행은 병사들에 의하여 대정현을 거쳐 제주목사 이원진이 있는 제주읍 삼도리의 제주목으로 옮겨져 수용되었다. 말이 통하질 않아 자초지종을 물을 수는 없으나 대충 비  바람에 표류한 어떤 서양 코쟁이들임에는 틀림없다고 판단하고 이원진은 한양 땅에 상소를 띄웠다.


“전하, 저 제주 바닷속 깊은 물처럼 파란 눈에 콧대가 이곳 한라산 봉우리만큼 높은 이방인들에 대한 처리 지침을 내려주옵소서!”


이윽고 상소가 올라간 두 어 달 후. 10월29일 제주목사 이원진에게 하멜 일행은 다시 불려갔다. 하멜 일행은 동헌에서 붉은 수염이 난 중년의 사내를 발견한다. 피는 물 보다 더 진하다고 했던가. 그를 보는 즉시 같은 네덜란드 동포임을 확인하고 뛸 듯이 반가웠다.


“하이고, 당신은 우리 동포가 아니오?”


“맞아, 그--- 그런가 보네.  . . . . . !”


“맞소이다. 나도 여러분과 같은 네덜란드인이오. 허지만 지금은 . . . . . . . ”


멋적게 대답한 사람도 바로 1627년 (인조 5년). 일본으로 항해하다가 조선에 표류했던 네덜란드 사람, 얀센 벨테브레(Jansen Weltevree)였다. 그는 이미 1628년 일본으로 가던중 제주도에 표류하여 조선에 억류되었던 사람이었다. 조선 정국 사정상 고국으로 돌아갈 길이 없음을 미리 파악한 그는 아예 이름도 아예 박연 朴燕 으로 정하고 살아오고 있었다.

그는 하멜 일행의 ‘사연’을 조사하기 위해 한양 땅에서 파견되어 왔던 것이다. 말이 통하는 ‘동포’를 만났다는 기쁨에 들떠 있던 하멜 일행에게 벨테브레가 전해준 말은 충격 그 자체였다.


“여기 계신 여러분들을 전하께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여러 번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이 나라는 표류해 온 외국인들을 결코 ‘본국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 하니 이를 어찌하면 좋습니까. 동포 여러분?”


하멜은 이렇게 대답하며 파아란 눈에 높은 코를 실룩거리며 울먹였다.


“허허-- 큰 큰일났네. ”


“아하--  이를 우째노? ”


  박연은 조선의 ‘을례’ 라는 조선 여인과 결혼까지 하여 조선인으로 귀화하여 훈련도감에서 전술을 가르키며 왕명에 따라 대포를 만들었다. 그는 또 병자호란 때 전쟁에 출전하는가 하면 청나라에서 밀수입한 홍이포의 제작법과 조작법을 가르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효종은 북벌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면서 장수 이완에게 실무책임을 맡겼고 박연으로 하여금 그를 보좌하게 하기고 하는 전쟁의 중요한 역할을 맡게 하였다.


그린 하멜의 설명을 듣다가 온동 평론가는 중간에 끼어 든다.


“1653년 8월 ‘헨드릭 하멜’ 에 앞서 1627년 같은 네덜란드인인 얀센 벨테브레가 몇 년 더 조선에 왔는가 하면 1604년 6월에 경남 통영에 포르투갈인 ‘주앙 멘데스’가 표류해 왔어요. 내가 조사해본 자료에 의하면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된 비변사 문서인 ‘등록유초 登錄遺草’ 에는 ‘지완면제수’ 라는 포르투갈인 이름의 ‘주앙멘데스’ 라는 서양인이 먼저 조선 땅을 밟았다고 합니다.”

이어 온동 평론가는 열변을 토한다.


“기록을 보면 멘데스는 지금까지 발견된 기록으로 볼 때 조선과 접촉한 사실상 최초의 서양인이예요. 멘데스가 비변사에서 조사받고 명나라로 송환됐다가 다시 마카오로 이송된 것까지만 현재 확인되고 있어요. ‘등록유초’ 의 멘데스에 대한 기록은 상세 합니다. 나이는 34세이며, 포르투갈(포르투갈․일본식 표기)상인이었지요. 그의 나라는 남만 南蠻 유럽의 여러나라 중 하나며 옥․비단․금․은 등을 많이 생산한다고 해요. 그는 어릴 때 부터 장사를 했고 고국을 떠난 지 거의 15년 이나 되었다. 연전에 마카오에서 캄보디아로 갔으며 다시 장사하러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기 위해 일본배에 탑승했다가 조선으로 표류했다 고 적혀 있지요. 그리고 멘데스가 탄 배는 일본의 최고통치자 였던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캄보디아 국왕에게 보내는 친서를 싣고 갔던 무장 외교선박이자 무역선이었어요. 친서를 전달 하고 일본으로 돌아오던 증 풍랑을 만나 당시 조선 통영에 표류한거지요. 조선정부는 이 배에서 중국인 16명, 일본인 32명, 남만인 2명을 생포해 서울로 압송했어요. 남만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멘네스이고, 다른 한 명은 멘네스의 시종으로 따라온 ‘흑인 潶人 ’이예요. 그러나 마카로 사람으로 추정되는 흑인에 대한 기록은 없어요.“


온동 평론가의 ‘주앙멘데스’ 한국 상주설에 이어 그린 하멜의 본래 이야기로 돌아간다.


  당시 헨드릭 하멜 일행은 서울에 도착한 뒤 훈련도감에 배속되었고, 엄중한 감시 속에서 조선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고국인 ‘풍차와 꽃의 나라’ 네덜란드로 돌아가고픈 열망은 한 시도 멈출 수 없었다.


“하, 그 당시 얼마나 고국이 그리웠을꼬오---”


히딩크가 하이네캔 맥주를 마시며 하늘을 보고 한숨을 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시몬 단장도 한숨을 지었다.


“그러게 말 입니다. 억류 외국인을 잘 돌봐야 할 터인데. . . . . . 지난 나라의 조정이 말을 안들었구나, 안들어? 조정에서는 당파싸움만 짙어만 가고 임금은 주색에 빠져있었으니  . . . . . . 쯧쯧 쯧. . . . . . ”

길벗 작가가 혀를 차는 사이에 울분과 고통에 열변을 토하고 있던 그린 하멜이 말을 이어간다.


“오죽해야 그 당시 우리 선조인 헨드릭 하멜이 답답한 마음을 달랠길 없어 타국인 유배지에서 ‘하멜 표류기’란 전기를 썼어요. 당시 이 나라의 지리와 풍속, 정치, 군사, 교육, 교역 등을 망라한 글이지요. 물론 박연이란 이름으로 개명한 ‘얀센 벨테브레’ 라는 친구가 도와 주고 있지요. 그 친구는 이 나라 조선놈이 다 되었어. 인물이 빼어난 ‘을례’ 라는 조선 여인 끌어안고 나뒹굴더니 이제 애 까지 낳았으니 말이야. 제기럴 쳇 . . . . . . ”


그린 하멜의 열변에 달림 교수가 맥주를 든다.


“왜 조선놈 하며 욕허노?”


“아, 그래요. 미안 합니다. 당시 조선인으로 귀화한 얀센 벨테브레가 얄미워서요.”

다시 그린 하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1655년(효종6년) 3월. 서울을 방문하고 떠나던 청나라 사신 일행의 행차 앞으로 하멜 일행 가운데 두 사람이 갑자기 뛰어 들었다. 힘이 있는 청나라 사신을 통하여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여 자신들을 일본으로 보내 달라고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용감무쌍하게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다름 아닌 암스테르담 출신의 조타수 얀츠(Jansz)와 사수 보스(Bos)가 그들이었다.


“우리 좀 데려다 줘요? 예? 우리는 억류 네덜란드인이요. 왕서방. . . . . .!”


“에이 --저 놈을 잡아라. 저 양 코잽이 화란 놈 같으니. . . . . .”

일순간 거리는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청나라 사신의 바지 끝을 잡고 울부 짓는 얀츠 일행과 이를 제지하려는 조선 병사의 실랑이로 이어졌다. 이에 당혹한 조선의 호위장군과 청나라 사신 일행은 잽싸게 말을 달려 현장을 빠져 나갔다.

그것은 이 일이 ‘역 효과’를 낳고 말았다. 두 사람은 감옥에 갇혔다가 병사하였고, 나머지는 다시 전라도 지방으로 옮겨졌다. 하멜 일행과 청나라 사신들과 아예 마주치지도 못하도록 한 것이다.


“에이잇--- 골치가 아프다. 화란인들을 전라도 남방 등지에 분산 부처하고 감시를 철저히 하라.”


외국 사신에게 망신살이 뻗친 효종은 강력히 명했다. 간신히 살아남은 하멜 일행 서른세 명은 1655년부터 다음해까지 전남 강진 등지에 분산 수용되었다. 그 오랫동안 하멜 일행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처절한 것이었다. 하멜 일행은 그들을 감시하는 책임을 맡고 있는 지방 관리의 성향에 따라 회비가 교차할 수 밖에 없었다. 푸른 눈과 코가 큰 이방인인 이들을 불쌍히 여기고 호의를 베푸는 지방관리도 있었지만, 가혹하게 사역시키며 몸과 마음에 고통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들은 날마다 할당된 양 만큼의 멍석을 짜거나, 동헌 마당의 풀을 뽑고, 산에서 나무를 베어 오는 노역을 해야만 했다. 흉년이 든 해에는 더욱 처절했다.


“우리 백성도 굶는데 코쟁이 외국인을 먹여 살릴 수 없다.”


이들에게는 생필품조차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서 구걸을 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졌다. 그런 와중에 1663년이 되면서 일행 가운데 나머지는 병사하고 스믈 두 명 만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들의 살아가는 환경은 이랬다고 그린 하멜은 전한다. 전라도 강진땅은 산으로 둘러싸인 널찍한 평지 마을 었단다. 초가집 돌담마다 감나무가 불쑥 불쑥 솟았다. 푸른 하늘에 주황빛 감들이 보석처럼 박혀 가을이 환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돌담길 골목도, 마을 한 가운데 우뚝 선 커다란 은행나무도, 모두 선명한 가을빛에 감싸여 있다. 이곳은 얼핏 보아 남도의 여느 마을과 다를 바 없이 평범해 보이는 풍경이다. 많은 집들이 흙과 짚을 이겨 돌을 쌓아올린 아름다운 돌담을 유지하고 있다. 빗살무늬 형태로 쌓아오린 돌담이 특이하였다. 담의 높이도 2m를 웃돈다. 이 마을이 예전에는 남자들이 떠돌이 행상으로 외지에 있는 경우가 많아, 여자들만 살아 남은 집을 들여다보지 못하도록 높게 쌓았다고 한다.

이곳에서 헨드릭 하멜은 ‘하멜 표류기’ 를 써 조선의 존재를 서양에 처음으로 상세하게 알렸다고 한다. 하멜과 일행 일부는 결혼해 자식까지 낳았고 11명은 이곳에 뼈를 묻었다. 남은 이들은 인근의 순천, 남원 등으로 분산 수용되 뒤었다.

  1666년(현종 7년) 9월 하멜 등이 탈출을 감행해 일본 나가사키를 통해 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들은 은행나무 밑에 앉아 동남쪽 수인산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랬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이 나무를 ‘하멜 은행나무’로 부른다고 지금껏 전해지고 있다.


아까부터 이들의 아픈 지난 선조들의 얘기를 하며 슬퍼하자 함께 앉아있던 솔다 시인이 애절하게 시를 읊조린다.


하늘 아래 땅 위에 가장 귀한 것이 인간이라 했으네/

우주 만물 다 같은 생명일진데/

그 무엇이 달라 차별하고 무시하였단 말이련가/

사람사는 게 별것 아니느네/

까짓 바람 같고 구름 같은 것/

1백년 못 살고 떠나는 우리네 소풍 같은 찰라의 인생/

어우렁 더우렁 정과 살을 섞으며 살자네 그려/

더우렁  어우렁 그렇게 살자네 그려/

저 유유히 흐르는 바닷물처럼  어우렁 더우얼 살자네 그려/

                                            - 詩 ‘어우렁 더우렁’ 全文


  잠시 솔다 시인의 시 낭송을 매개로 쉬었다가 맥주를 비운 그린 하멜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렵게 조선을 출발한 하멜 일행을 태운 배는 10여일의 거친 항해 끝에 일본의 어느  조용한 어촌 항구에 닿았다. 이들은 나가사끼에 흩어져 있는 고토(Goto-archipelago)섬 부근에서 일본인 어부에게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이국적인 복장을 하고 조각배로 표류중인 8명의 네덜란드인들에 대한 연락을 받은 일본 당국에 의해 당장 나가사끼 본부로 이송 되었다. 일본 관리가 조사한 결과  그들은 실종된 네덜란드 상선 ‘스페로 호크(Sparrow Hawk)’호의 선원임으로 나타났다.


“갖은 고생으로 어려운 한 때를 보내기도 했으나 살아남기 위해 구걸해야 할 때도 있었지요. 우리 일행 중에 12명은 몇 년이 지나 사망했고, 마지막 생존자는 16명 이었는데 그들 중에 8명이 몇 차례의 실패 끝에 조선을 탈출하는데 성공할 수 있었지요.”


처절하리만치 파리한 모습으로 이들은 일본 관헌한테 진술하였다. 일정한 조사가 끝난 후 이들은 일본 조정의 방침에 따라 네덜란드 고국으로 안전하게 보내어졌다. 이 당시 일본 조정은 일찍부터 나가사키 항구를 통하여 서구 열강에 문호를 개방하여 네덜란드 등과 무역 거래를 트고, ‘난학(네덜란드를 배우자)’이란 이름으로 그들의 선진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였던지라 하멜 일행은 국빈 대접을 융숭하게 받고 편안하게 고향으로 갈 수 있었다.


정한 情恨 지난 얘기를 듣다보니 해가 뉘엿뉘엿 서편 한강가로 지고 있었다. 붉거나 노랗거나 파랗거나 그렇게 팔색조처럼 노을이 지면서 하루가 해가 저물고 있었다. 까치축구의 한강 감독이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말한다.


“자, 이제 하딩크 감독이 고향에서 가져온 하이네켄 맥주도 맛있게 마셨고, 그린 하멜 선생의 아픈 먼 기억의 선조 헨드릭 하멜 선생의 얘기도 들었으니 우리 천천히 저 아래 노을공원 산책이나 하며 내려 갑시다.”

까치축구팀의 한강감독은 일행을 안내하면서 난지도 개발과 노을 공원에 설명을 했다.

이곳 난지도는 난초와 지초가 자라고 철따라 온갖 꽃이 만발해 있던 아름다운 섬이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새들의 먹이가 되는 수생 동식물 또한 풍부해 겨울이면 고니 떼와 흰뺨 검둥오리 등 수 만 마리의 철새들이 날아드는 자연의 보고였다.

난지도는 망원정 부군에서 한강과 갈라진 난지 샛강이 행주산성 쪽에서 다시 본류와 합쳐지면서 생긴 섬이었다. 한강 하류 삼각주로 편마암 지대인 난지도에는 자연스러운 모양의 제방이 있어서 조선말까지 놀잇배가 정박하는 곳으로도 이용되었다. 옛 선조들은 나라의 정사가 잘 되는지를 알려면 난지도에 핀 꽃들을 보면 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택리지 ’에는 난지도가 좋은 풍수조건을 가진 땅이라고 적혀있다.

이 책에 따르면 사람이 사는 터로 가장 이상적인 풍수조건은 강을 타고 굽이굽이 바닷물이 거슬러오는 길목에 굵고 단단한 모래로 다져진 땅 이다. 또 그런 땅에서 솟아난 담수가 사람에게 가장 좋다고 했다. 바로 이와 같은 풍수 조건을 갖춘 땅이 난지도였던 것이다.

1978년 쓰레기를 매립하기 전, 난지도는 땅콩과 수수를 재배하던 밭이 있던 평지였다. 낮은 땅이었기 때문에 홍수 때면 집이 물에 잠기는 고통을 겪기도 했지만 학생들의 소풍장소나 청춘남녀 의 데이트 코스로 사랑 받았으며 애정영화의 세트 장소로 이용되기도 했던 아름다운 섬이었다.

한 세대 전까지만 해도 꽃으로 가득했고, 오랜 길을 날아온 새들이 쉬어갈 정도로 아름다웠던, 이름마저도 향기로운 섬, 난지도. 이곳이 악취가 풍기고 오물이 넘쳐나는 쓰레기 산이 되었던 것은 역사가 만들어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곳 난지도는 난초와 지초가 자라고 철따라 온갖 꽃이 만발해 있던 아름다운 섬이었다. 물이 맑고 깨끗하여 새들의 먹이가 되는 수생 동식물 또한 풍부해 겨울이면 고니 떼와 흰뺨 검둥오리 등 수 만 마리의 철새들이 날아드는 자연의 보고였다.

난지도는 망원정 부군에서 한강과 갈라진 난지 샛강이 행주산성 쪽에서 다시 본류와 합쳐지면서 생긴 섬이었다. 한강 하류 삼각주로 편마암 지대인 난지도에는 자연스러운 모양의 제방이 있어서 조선말까지 놀잇배가 정박하는 곳으로도 이용되었다. 옛 선조들은 나라의 정사가 잘 되는지를 알려면 난지도에 핀 꽃들을 보면 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지리서인 ‘택리지 ’에는 난지도가 좋은 풍수조건을 가진 땅이라고 적혀있다. 이 책에 따르면 사람이 사는 터로 가장 이상적인 풍수조건은 강을 타고 굽이굽이 바닷물이 거슬러오는 길목에 굵고 단단한 모래로 다져진 땅 이다. 또 그런 땅에서 솟아난 담수가 사람에게 가장 좋다고 했다. 바로 이와 같은 풍수 조건을 갖춘 땅이 난지도였던 것이다.

이곳은 귀이깨, 모르치, 물치, 구릉지 같은 예쁜 이름들로도 불렸다. 언제부터 난지도라 불렸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난지 蘭芝 '는 난초와 지초 芝草 를 아우르는 말이다. 난 과 지 는 모두 은근한 향기를 지닌 식물로, '난지'란 흔히 지극히 아름다운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단어이다.

한 예로 지초 芝草 나 난초와 같이 그윽한 향기가 나는 두 사람간의 절친하고 고상한 사귐을 우리는 '지란지교 芝蘭之交 '라 표현한다. 난지도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들은 약 대여섯 개에 이릅니다.

난지도 蘭芝島 는 철따라 온갖 꽃이 만발해있어'꽃섬' 이라 불리기도 했으며 김정호의 ‘경조오부도 京兆五部圖 ’ 나 ‘수선전도 首善全圖 ’ 에는 꽃이 피어있는 섬이라는 의미의 '중초도 中草島 '로 기록되어 있다. 실제로 구한말까지는 이 명칭으로 불렸다고 한다.

또, 오리가 물에 떠있는 모습과 비슷하게 생겼다 하여 '오리 섬' 또는 '압도鴨島'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로부터 여러 종의 철새 수십만 마리가 겨울을 나기 위해 한강으로 날아들면서 바로 이 난지도 위에서부터 내리기 시작한다고 하여 옛 시인들은 '문섬 門島 '이라 미화해 부기도 했다.

1978년 서울시는 이런 난지도에 월드컵공원을 조성하였다. 아름다운 섬 난지도 80여만평에 1993년까지 15년간 서울시는 쓰레기 약 9,200만톤을 매립하여 버려졌던 땅에 환경공원을 조성하였다. 환경공원에 걸맞는 공원이용문화를 만들어 가고자 했던 것이 바로 오늘의 월드컵 공원이라며 까치축구팀의 한강 감독이 강조한다.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이곳 노을공원은 자연 식생지, 운동시설 및 산책로 등 시민들이 여가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 졌습니다. 넓은 잔디밭으로 조성된 진입광장은 휴게 및 운동공간으로 활용되며 바람의 광장과 노을광장은 서해의 아름다운 해질 녘 풍광을 감상할 수 있는 곳 입니다. 따라서 이 노을공원은 생태관찰공원과 야생화단지는 생태환경으로서 토지의 안정성을 높여 야생동물의 서식처가 되고 있습니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통일축구교실의 시몬 교장이 말한다.


“한 때 버려진 쓰레기 불모지 땅에서 이렇게 다시 태어난 아름다운 창조의 땅으로 거듭난 곳이 바로 이곳 난지도 입이다. 따라서 이번 독일 월드컵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의 신화의 벽을 뛰어 넘어 우승을 하도록 우리 무두 기원해야지요.”


그러자 팔짱을 끼고 걷던 별그늘 화가가 박수를 치며 연호한다.


“짝짝짝--- 오우케이! 시몬 교장 선생님 좋으신 말씀. 저렇게 활짝 핀 난지도 蘭芝島 의 꽃섬처럼 우리 대한민국에 활짝 핀 월드컵이 되었으면 해요.”


아까부터 아드보카트 감독과 밀착대화를 하던 금이 시낭송가도 박수를 치며 좋아한다.


“감독님 이번 월드컵은 이겁니다. 이것 알지요?”


금이 시낭송가가 엄지손을 들어 보이며 승리의 연호를 하자 아드보카트도 두툼한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한다.


“오우케이 월드컵 코리아 빅토리, 오우케이 월드컵 코리아 빅토리!”


일행은 히딩크가 특별히 주문해온 그의 고향 마을의 피에르체 펖 주점의 하이네캔 맥주와 전국의 명산명주에 취해 물끄러미 한강의 노을을 바라보며 난지도를 뒤로 한 체 걸었다. 까치축구팀 한강감독의 긴 설명을 들으며 한강에 풀어지는 노을을 바라 보노라니 그렇게 하루가 아쉽게 가고 있었다.

붉은 노을은 아드보카트 감독의 볼에서 녹녹하게 익더니 다시금 한강물에 풀어지며 세수를 하듯 붉게 타고 있었다. (끝)


 

출처 : 김우영 작가방
글쓴이 : 나은 길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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