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 월드컵
작가 김우영
김삿갓은 히딩크 일행과 남북 월드컵 친선 경기가 있던 날 서울 상암경기장’을 빠져 나오며 많은 걸 생각하게 되었다. 구름처럼 몰려있는 하얀 물결의 스탠드 관중석으로 부터 하늘을 찌르는 듯한 환호성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찬수 오오빠아--”
“대-한민국 남열이 오오빠아--”
“오--오오-- 빠아--”
벌떼가 윙--윙-- 거리듯 소요에 가까운 관중석의 열화와 같은 함성에 귀가 아플 정도였다. 특히 10대에 이르는 여고생들의 극성스러운 소리와 울부짓음은 과연 ‘오빠 월드컵’이란 말이 무성할 정도로 그 처절한 괴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김삿갓이 지난 서울과 전국을 떠돌던 때의 일들이 생각이 났다. 늘 지신의 삶이 하늘을 벼개삼아, 구름을 심심 파적 친구로 삼아 기웃기웃 하며 동가식 서가숙 東街食西街宿하는 삶인지라 장안의 일들은 빼곡이 기억하고 있었다.
서울의 1930년 때 후반 서울 동양극장 앞은 연일 인산인해를 이뤘었다. 동양극장 간판 스타인 황철 배우를 보기 위해 장안의 여성들이 아침부터 한복을 잘 차려 입고 몰려든 탓이다. 인기배우 황철을 향한 여성들의 마음은 훗날 배호와 남진, 나훈아, 조용필, 서태지 등의 대 스타 탄생을 예고 했었을까. . . . . . ?
해방 전 새로운 문물이 대중에게 확산될 때 여성들은 가수 남인수의 깔끔함에 목을 맸다. 그래서 한 때 이런 말이 유행했었다.
“남인수는 잘 때 머리가 흐트러질까봐 목침을 베고 잔다더라!”
‘카더라!’ ‘카더라!’ 소문에 많은 여성들이 코를 골며 잠을 자는 남편을 돌아보며 한숨지었다.
“쿨-- 쿨-- 쿨-- ”
“어유, 멋대가리 없는 위인아. 코만 골고 자면 다 인줄 아나?”
“남인수를 닮으면 어디가 죽나? 아프나? 어휴---- 내가 저런 인간하고 평생 살아야 하다니. . . . . . 아이구 가슴이야, 사슴이야. . . . . . ! ”
깔끔함은 곧 세련됨이라는 등식이 성립될 때 였으니 . . . . . 장안에서 한다 하는 여인들의 목을 그토록 매이게 했던 절대적인 애수의 가수 ‘남인수’를 꿈인들 잊을 오빠부대들이 아니지. 아암 그렇구 말구.
보일듯 말듯한 아련한 설레임은 대 스타들을 향하여 속옷을 집어던지며 까무러치는 “오빠‘ 와 ’오빠부대‘들의 탄생에 단초를 제공하였다. 대중 스타들에 의존 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대에 걸맞는 시대적 인기스타에 대한 오빠부대 거리의 메니아들.
개화기 초기 내놓고 이런 대 스타들을 사모할 수 있었던 이 여성들은 기생들과 신여성들뿐이었으니 아직 정비석의 ’자유부인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을까. . . . . .
1960년대 청춘을 보낸 이들에게는 ‘낭만파 저음의 가수 배호 오빠가 있었다. 온 기자의 집안 누나 한 사람도 배호 때문에 자살까지 하는 큰 사고를 눈물겹게 요상한 마음으로 지켜 보았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아수라장을 뒤로 하고 여성들은 갈증을 달래듯 낭만을 찾았다.
요절한 가수 배호는 벽에 기대어 숨 가쁘게 노래를 할 정도로 야리야리한 매력을 풍겼었다. 쉽게 말하여 그 당시 여성들을 죽여 주면서 노래 부르다가 쓰러지기를 반복하던 그는 뭇 여성들의 가슴을 아프게 뻥-- 뻥-- 뚫어 놓고는 장춘단공원 뒤편으로 안개처럼 홀연히 사라졌다.
그 상처 때문인지, 그 아픔을 보상이라도 받듯 여성들은 야성미를 물씬 풍기는 남진․나훈아에 대하여 한때 열광을 했다. 수많은 여성들이 농촌에서 열차를 타고 공단으로 도회지로 몰려오면서 남성을 향한 욕망이 노골화되던 시대였다. 도회 지향이냐 고향 지향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남진․나훈아가 작동한 강력한 인기코드는 다분히 짓눌린 남성들에 대한 성적 매력이었다.
남진은 서글서글하며 잘 생긴 외모에 시원시원한 가창력으로 여성팬들을 오빠부대라는 올가미를 만들어 울리고 울렸다. 이상적인 세계에 도전하는 부드러운 음색의 화음으로 ‘저 푸른 초원 위에’ ‘가슴아프게’를 뼈 저리게 부르며 전국을 누볐다. 때 마침 당시 전 세계를 휩쓸던 미국의 앨비스프레슬리의 화려한 복장으로 몸을 흔들어대어 더욱 여성의 마음을 무대아래로 침이 흘리도록 사로 잡았다.
반면 나훈아는 텁수룩한 수염에 검으잡잡한 머슴형 외모에 호소력 있는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고향역’ ‘물레방아 도는데’ 등의 농촌 회상곡 등으로 고향 떠나 가발공장, 미싱공과 재단사로 있는 농촌의 소녀들을 노스텔지어의 세계로 흡입하면서 오빠의 우상으로 지존의 자리를 지켰다. 더욱 그는 미국의 남자 배우 찰슨브른손을 닮아 더욱 거친 성적 남성으로 돋보였다.
남진과 나훈아가 인기절정의 쌍벽을 이루면서 당시 오빠부대 여성팬 들끼리 인기세를 내세우며 서로 극장가에서 손 걷어 부치고 싸우는 등 웃지 못할 헤프닝도 연출했다.
“남진, 오빠가 최고야!”
“아니야. 훈아 오빠가 인기가 좋아!”
“우우우-- 와와와 -- ”
배호의 뒤를 이은 남진․나훈아 오빠는 ’씩씩한 사나이‘의 기상을 내보이며 가는 곳마다 여성팬들을 몰고 다녔다. 월남으로 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 서독으로 날아 다닌 배호, 나훈아, 남진 삼각편대는 이 나라 여성들의 손수건을 적시고 속옷을 많이도 벗겨 허공에 날렸다. 이들로 말미암아 한때 서울 남대문과 평화시장의 속옷 장사가 잘 되었다는 웃지못할 장안의 화제도 낳았다.
1970년대와 송창식.
통키타와 청바지, 생맥주로 상징되는 포크문화를 대표하며 트윈플리오 시대를 열었다. ‘고래사냥’ ‘왜 불러’ ‘하얀손수건’ 등은 뜻 있는 대학생들과 지성인들에게 호소력있게 어피일 되고 그 애절함에 매료되었다. 오죽해야 밤과 별을 보며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밤창식, 별창식, 모든 말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해서 붙인 왜창식이라고 불렀을까. 허구 많은 팬 들과 오빠부대를 몰고 다닌 그들과 우울한 시대의 그 시대 그 시절 가수와 오빠부대 월드컵 스타들.
‘부산 발 돌아와요 부산항에’
1980년대. 작은 거인 국민가수 조용필 오빠가 부산에서의 서울로 급거 상경하면서 남 다른 ‘비범함’으로 무대 지존의 자리에 우뚝 섰다. 그만의 그 시대를 열광적으로 열어 제끼었으니. . . . 열정적인 목소리와 작은 몸짓, 아담하게 빠진 그의 외모는 많은 구로공단과 가리봉동 아가씨들을 울리며 ‘용필이 오빠부대’를 탄생시켰다.
월드컵이 열리기 얼마 전. 김삿갓은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여주기 위하여 히딩크와 엘리자베스, 하멜 일행을 데리고 종로 인사동을 찾은 적이 있었다. 젊은이들과 외국인들 사이를 비집고 막걸리집을 찾았다. 어찌 먹어야 좋을지 몰라 멈칫하는 히딩크에게 막걸리는 막 걸러 막걸러 마시는 게 제 격이라며 홀짝 마시라고 권했다. 한잔을 훌쩍 넘기고는 히딩크가 묻는다.
“도대체 용필이 신드롬이 무어야? 김삿갓 선생.”
“그야 이거겠지 뭐. 근래 축구 경기장의 팬들이 스탠드에서 찬수오빠-- 남열이 오빠-- 하며 외칠 때의 함성 같은 것이야. 극성스런 여성팬들이 용필이 오빠에 대한 일련의 병적 징후를 총괄적으로 나타낸다는 거겠지.”
김삿갓은 한국의 오빠 징후군, 인기스타들에 대한 팬들의 정황과 흐름에 대하여 설명했다. 조용필이란 가수가 외모가 아닌 실력으로 오빠 신드롬을 업그레이드기 전, 오빠 신드롬에는 중요한 실험 무대들이 있었다. 천편일률적인 트로트가 아닌 자기 목소리를 내건 다양한 포크가수들이 쏟아져 나온 것이다. 통키타 그룹 ‘어니언스’가 ‘양파들’로 ‘코인즈’가 ‘엽전들’로 ‘바니걸스’가 ‘토끼소녀’로 강제 개명되는 시절에도 이미 감성의 변주를 맞본 대중들의 취향까지 ‘오와 열을 맞춰’ 줄을 세울 수는 없었다. 이런 배경을 딛고 등극한 조용필은 트로트에서 록까지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대중의 높은 눈 높이와 넓은 취향을 대체적으로 만족시켰다.
1990년대에는 서태지가 열었다. 그는 한국 대중음악계에 새로운 세상을 열어 젖힌 뛰어난 뮤지션인 동시에 자신이 보여주고 싶은 모습을 가려서 보여주는 발군의 기획자였다. 서태지가 스스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 유례 없는 신드롬을 낳았다. 그 뒤를 이은 스타들은 제2의 서태지 신화를 꿈꾸는 다른 이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때부터는 결과로서의 신드롬이 아니라 목적이나 목표로서의 신드롬이 자리를 잡았다. 치밀하고 정교한 스타시스템에 따라 외모나 실력으로는 모자라 분위기까지도 차별화된 스타들이 속속 등장한 것이다. ‘만들기 좋은’ 까닭에 오빠들의 연령대는 급속도로 낮아졌다.
가요계의 ‘이단아’ 서태지는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결별시키며 전폭적인 쾌락을 많은 여성들에게 안겨 주었다. 신 세대 팬 클럽을 수 없이 탄생시키고 공연장마다 울부짓는 많은 여고생들이 한꺼번에 ‘오빠’를 외치며 몰리는 바람에 관중석의 압사 사건과 거리의 소요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금지된 욕망의 빗장을 연 1990년대와 2000년에는 터프가이와 섹시가이로 대변되는 구준혁과 강원래 군단 . 또 쿨가이․꽃미남들이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많은 여고생과 초년의 아가씨들은 이들 스타의 변화에 순응하며 오빠를 외쳐야만 했다. 무대의 싸이텔릭한 음악과 현란한 조명, 물결치듯 거대하게 움직이는 거리의 오빠 부대들. . . . , . .
또 뒤를 이어 2002년대에는 터프가이의 변종인 사고뭉치 악동들과 꽃미남의 변종인 미소가 아름다운 착한 소년들까지 스펙트럼은 넓어졌고 항목들은 빠르게 분화됐다. 살인적인 미소와 꽃미남의 대표적 스타인 김재완과 안정연에 이어 그 아찔한 속도감 속에서 드디어 우리의 터프가이 김남열이 등장했다.
“히딩크 감독 당신이 가르친 월드컵 제자인 남열이가 바로 우리 시대의 오빠 월드컵 스타예요. 그것이 우리나라의 당면한 스타들에 오빠부대 문화이고 말고요. ‘
“오오 그래요. 남열이 그 놈 앞이 보여요. 사람이 당차고 수비와 공수가 발 빠른 놈이요. 내가 한번 키워 볼거요.”
“그 선수는 인천 앞 바다 작은 섬 대무의도 출신의 섬소년이요. 남열이는 2002년 월드컵 스타로써 오빠중에 가장 강력한 오빠 코드로써 지존의 자리에 우뚝 서고야 말았지요. 그의 다듬어지지 않은 말솜씨 툭툭 내뱉는 그의 거침없는 말솜씨가 더욱 오빠로 우뚝 서는데 지룃대 역할을 한 것이요. 어려웠던 가정환경과 나이트 클럽 웨이터를 맴돌았던 그에게 월드컵은 한마디로 성공의 감동에 드라마였어요. 어려웠던 시절의 묵직한 감동버젼이 그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에는 경쾌하며 다이나믹한 버젼으로 바꾸어 놓아 남열이 신드롬은 수 많은 오빠부대를 탄생시킨거지요. 그의 멘트의 백미는 바로 이것이라고 생각해요. 지난 국민대축제장에서 사회자가 묻는 질문에 대답한 첫 말이요.”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이 나이트 입니다. ”
대통령을 뒤에 세워놓고 하는 또 하나의 쇼믹한 멘트.
“즐겁고 좋은 하루가 되십시오.”
“하는 등의 나이트클럽 웨이터의 테이블 인사 멘트를 날리는 그의 거리낌 없는 화두. 월드컵 경기 이후 이어진 케이 리그전에서 수많은 소녀팬들은 남열이 오빠의 싸인 한 장 받기 위해서 몇 시간을 줄을 서고 기어히 한 장 받고는 싸인장에 뽀뽀하고 울고 불고하는 장면을 보았을 겁니다.”
“오오빠-- 오오빠 사랑해--”
“오빠 싸인 한 장 해줘. 그리고 나와 함께 춤을 --”
“우우우---와와와-- ”
“호호호--훌쩍 훌쩍--”
이 당시 김삿갓과 히딩크, 엘리자베스, 하멜 등도 덩달아 오빠부대의 군중에 섞여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곤 하였다.
“허허-- 이 거 이제 내 몸이 아니군. 여고생들의 치마폭에 신발이 벋겨지고, 머리카락이 온 몸에 휘감겼으니 . . . . . . , 긴 손톱에 물든 자욱이 팔 다리에 각인이 되었으니 이를 어째. . . 큰일났군.”
히딩크의 숙소인 하얏트 호텔로 가면서 김삿갓은 생각했다.
‘차암, 어리둥절한 일이야. 김남열 신드롬은 대를 이어 발전해온 사회적 감성을 벗어나서 만들어진 것은 아닐거야. ’오빠의 계보학‘ 은 여성들의 욕망과 함께 한 시대의 감성을 고스란히 반영한게야. 맞아.’
김삿갓은 경기때마다 기자석에 앉아 많은 스포츠신문 기자들과 대담을 나누곤 했다.
“축구선수이기 전에 모델로 먼저 알려진 안정연이 그라운드에서의 생생한 땀방울로 이미지를 바꿨다면, 김남열은 예고 없이 드러나 충격을 준 경우야.“
이 서울 기자가 말을 받는다.
“맞아 맞아요. 김삿갓 선생님. 이미지가 아닌 현실에서 튀어 나온 까닭에 오히려 김남열 신드롬이라는 현상은 그 시작과 끝이 쉽게 가늠되지 않아요!”
옆에 있던 박 평양平壤 기자는 다리를 꼬고 앉으며 말한다.
“화려한 태극전사들의 플레이를 보며 팬들은 이미지가 아닌 실체로서의 스타에 눈을 떴다구. 그러나 다수의 여성들이 선택한 대상은 안정연이나 홍명봐 송종곡이 아니라 말 많고 탈 많은 김남열을 찾는 거예요. 아름다운 꽃미남도, 듬직한 큰오빠도, 바른생활 소년도 아닌 ‘말썽꾸러기 옆집 소년’ 같은 김남열 오빠에게 빠져든 것이지요!”
얼마 전 일본의 축구를 취재하고 돌아온 맞통일 統一 기자도 한 마디 했다.
“월드컵 4강 진출이 라는 신화적인 결과와 노는 맛을 일깨워준 응원문화가 강력한 기폭제가 된 것 같아요. 지난 1998년 월드컵이 끝나고 이동곡, 고종소, 김은장 등이 수많은 여성팬을 확보했지만, 지금의 김남열 신드롬과는 거리가 있어요. 김남열은 축구가 좋고, 이기는 게 좋고, 노니까 좋다는 거지요.”
맞 기자가 정리하듯이 말한다.
“어찌하였건 남열 선수는 우리를 번쩍 뜨게 한 새로운 발견’의 불세출 스타예요.”
궁금한 듯 박 평양平壤와 이 서울 기자가 묻는다.
"오, 그 것이 무엇이에요?“
“으음 그것은 말이예요. 불안하지만 도발적 매력이지. 월드컵 직전까지 여성들의 욕망과 대중의 감성은 꽃미남에 머물러 있었어요. ‘나는 미소년이 좋다’를 쓴 남승희 작가는 그 까닭은 ‘여성들의 주체성․독립성이 커지면서 자신들이 리드 할 수 있는 남성에게 강한 매력을 느꼈다 이거지요. 보기에 좋아 가슴에 품기 좋고 자신의 말을 잘 들을 것 같은 착한 미소년들이 당연히 관계의 대리만족 대상이 된 것이다.’ 라고 분석한거지요. 그러나 김남열은 꽃미남 퍼레이드의 방향을 틀었다 이거에요. 그 효과는 미남에 근육질을 더한 정도의 진전이 아닌 듯해. 여성들의 새로운 욕망에 빙점을 찍는다 이거지요. 김남열과 꽃미남이 다른 점은 함께 모험을 할 수 있는 상대예요. 김남열은 결혼상대로서의 안정감을 주지는 않지만 함께 휴가를 떠나고 싶은, 불안하지만 도발적인 매력이 있다는 거지요. 그와는 유쾌한 에피소드를 만들 수 있을 것 같고, 재미있고 의리 있으면서도 나를 묶어두지는 않을 것 같다는 거지요.”
박 평양 기자가 손뼉을 친다.
“짝짝짝 맞아요. 그랬어요. 운동경기 때 스탠드에서 그랬어요. 여성팬들이 ‘남열아 불 꺼라, 잠 자자!’, ‘남열아 나이트 가자!’는 노골적이고 용감한 미니 플래카드의 문구가 도드라졌어요.”
수원 월드컵 경기장에 4만 2천여명의 관중이 몰리는 등 월드컵에 이어 케이 리그의 열기가 끝간 데 없이 치솟고 있었다. 공연장을 찾아 오빠를 외치던 여성팬들이 앞다퉈 축구장으로 발길을 재촉했었다. 연예계 스타의 싸인 여러 장을 축구선수 사인 한 장과 바꾸려는 거래의 열기도 식을 줄 몰랐다. 연예스타의 매력이 이미지 조작으로 관리될 수 있다면 축구스타의 매력은 관리될 수 없다. 그라운드는 선수의 실력을 정확하게 내보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김남열 신드롬이 자리잡고 있는 ‘위태롭고도 자극적인’ 지점일 것이리라.
‘과연 오빠들의 시대적 코드는 무엇이었을까?
어느 시대나 ‘오빠’는 있었다고 김삿갓은 생각했다. 그리고 누구나 ‘오빠 신드롬’의 효시는 자신의 우상인 “오빠”로부터 출발했다고 믿는다. 그 믿음의 바탕에는 자신의 ‘오빠’를 절대화하려고 자신의 욕망에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는 속성이 깔려있다. 따라서 오빠를 향한 열광은 한 시대의 욕망을 설명하는 키 워드 라고 생각했다. 김남열, 이찬수를 향한 뜨거운 바람은 과거보다 광범위하고 훨씬 노골화된 우리 시대 여성들의 욕망을 진원지로 하고 있다.
감정을 감추는 게 미덕인 시대를 벗어나면서 여성들은 그 시대 그 상황에 맞는 ‘오빠’를 찾아냈다. 누룽지에 서러운 부엌에서의 찌든 주부생활, 시어머니로 부터의 값비싼 가정적 도덕율, 남성우월주의로 부터의 멸시와 탄압이 이들의 옥죄인 저고리 가슴을 저리도록 옭아맸다. 무언가를 향하여 분출하고 싶은 이들의 탈출구, 그러다가 찾은 거리의 여성들은 뜨거운 사랑 속에 수많은 ‘오빠들’ 이 명멸했다.
이들의 행동과 말 하나하나에 유행어가 속출하고 헤어패션과 의상 등이 변하여 사회적인 변종 유행문하를 가속시켰다. 그만큼 오빠를 향한 신 여성들의 기대는 맹목적이거나 절대적인 우상의 잣대로 스타 영역의 페이지는 넓혀만가고 있을 거라고 온 기자는 생각했다.
피곤한 몸으로 의자에 기대고 앉은 김삿갓은 하얏트 호텔 못미쳐서 장춘단 공원 중간에 내렸다. 오늘은 좀 걷고 싶었다. 산 아래로 반짝이는 건물의 네온싸인과 수없이 반딛불처럼 오가는 차량들이 보인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술 한 잔 걸치고 가기 쉬운 빗속의 유혹이 짙은 분위기였다. 요절의 낭만파 가수 배호의 노래 ‘누가 울어’ 같은 녹녹한 기분에 온 기자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 눈물 같은 이슬비이-- 누가 울어 이 한 밤 -- 잊었던 추억인가-- ’
호텔로 가는 길목엔 있는 이른바 몇군데의 술집들이 있다. 잠이 안오거나 고향 네덜란드의 파르세펠트로가 생각이 나면 종종 찾아와 술을 마시던 곳이다. 그러면서 히딩크는 주변 골목이 자신의 동네와 제법 닮았다고 좋아하곤 했었다.
“내 동네 히딩크 다이크(히딩크 거리)에는 200년이 넘는 피에르체(작은 깃털)라는 펖 주점이 있지. 그곳에 종 종 가곤 했어요. 그 곳엔 내 여자 친구 정열적인 노랑머리인 ‘안센’도 있어요.”
“오오, 그래요. ”
저만치 가로수에 기대어 선 채 비를 맞는 어느 여인이 다소곳이 호객을 한다.
“대-한민국 --짝짝짝짝 -- 젊은 오오빠--짝짝짝짝 --”
“. . . . . . ?”
“놀다가요. 오--오빠 화끈하게 끝내줘.”
“오빠--오빠- 오오, 과연 오빠 월드컵 이로구나!”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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