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녀 정보나들이 헤아리기 총집합
작가 . 김 우 영
지난 일이다.좀 창피스런 얘기지만 지난 70년대부터 외국, 특히 가까운 바다 현해탄 건너 일본에서는 우리나라를 기생관광의 별천지로 여기고 떼를 지어 몰려드는가 하면,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기생파티’다 뭐다 해서 우리 민족의 국제적 체면을 손상시키고 나아가서는 뜻있는 우리 여성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킨 일이 있었다.
그런가 하면 우리 나라를 다녀간 미국 AP통신의 한 기자는 “오늘날 한국의 기생들은 시대와 함께 변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춤으로써 기생의 현대적 부활을 일으키고 있다. 이는 일본의 유명한 게이샤들이 점점 인기가 쇠퇴하는 것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기생에 대해 대단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확실히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국 관광객들에게는 기생이 큰 흥미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이런 부류의 얘기들은 실체와 관계없이 떠돌게 마련.
이곳저곳 흘러 다니는 말에 의하면 근래에도 달라지지 않은 것같다. 곱기만 한 우리의 여성이 이처럼 외국인의 접대용 꽃으로 웃음을 팔고 있다면 이는 체면 이전에 한국 남성의 자존심 문제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생이란 바탕은 물론 행실 자체가 옛날의 기생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관광 요정이나 호텔의 연회에 노리개감으로 참석하여 현대화된 몸짓으로 교태를 부리는 요즘의 기생들이 어찌 옛 전통과 품위까지 갖춘 기녀(妓女)의 전통적 기예(技藝)와 의기(意氣)를 알 것인가. 발 빠른 현란한 음악에 큼직한 엉덩이나 흔들어 대고 귀동냥 배운 일본 노래나 팝송을 부르다가, 초면의 손님이라도 돈만 준다면 호텔행을 서슴지 않은 유녀(遊女) 또는 요녀(妖女)라 불러야 할 것이다.
하긴 근래에도 최고급 요정에는 오직 기예만을 보여주는 기품있는 기생이 약간은 있다고 한다. 이들 기생은 관광객의 옆자리에 앉아 살냄새를 풍기며 음식 시중을 드는 접대부식 기생과는 달리 한국 고전 춤을 추고 창(唱)을 할 뿐, 결코 돈으로 유혹되는 대상이 아니라고 해서 우리의 드높은 기생의긍지를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옛날의 전통적인 기생과는 모든 면에서 비교가 안된다. 옛날 기생들은 용모도 용모려니와 선비와 대적할 수 있는 교양과 문장력을 갖추었으며, 갖가지 기예를 습득하고 멋과 풍류를 알았다. 비록 신분은 천했지만 권세에 굴북하는 일도 없었고 돈에 현혹되는 일도 없었다. 때로는 한량들과 정사를 나누기도 했지만 동물적 탐욕이 아닌 따뜻한 애정으로 자유의 날개짓을 만끽했다. 몸값이 정해진 것도 아니었고 포주에 매인 몸도 아니었다. 기녀(妓女) 그들은 진정한 자유인이었고 아름다운 풍류녀(風流女), 바로 그런 한 마리 작은 새였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떨리는 기녀가 있다. 그 이름 황진이(黃眞伊).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둘에 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얼운 님 오시는 날 밤이어든/. . .”
한 켜 한 켜 모아가는 정갈하고 아늑한 여심(女心)이 너무나 맛깔스럽다. 곱게곱게 모은 시간들을 사랑하는 임이 오신 날 밤 굽이굽이 펴겠다니 그 밤은 얼마나 소담스럽고 황홀할 것인가. 그리움의 정서를 이처럼 절절이 읊어낸 황진이 가슴을 생각하면 세월을 뛰어넘어 이 마음 주체할 길 없이 울렁거린다. 마음도 마음이려니와 우리말을 이토록 기가 막히게 잘 살려 쓴 시인이 또 어디 있을까. 그녀는 우리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시인의 한 사람이다. 과연 송도삼절(松都三絶)이다.
오죽했으면 백호(白湖) 임제(林悌)는 평안도 감사 부임길에 황진이의 무덤을 찾아가 술 한 잔 부어 놓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안타까워 했을까.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었는다.
홍안을 어데 두고 백골만 묻혔는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황진이의 본명은 진(眞), 자(字)는 명월(明月), 별명은 진랑(眞郞)이다. 어릴 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시(詩)와 그림은 물론 음악과 무용에 모두 뛰어났으며, 특히 용모가 출중하고 여성의 향취가 그윽하여 뭇 한량들의 가슴을 녹였다. 아무나 가까이 할 수 없는 별이었으며 활달하면서도 지조있는 기생의 꽃이었다. 십 년을 면벽수도한 지족선사(知足禪師)를 파계시킨 에로티시즘의 화신이었으나, 사랑은 오직 하나 그의 스승 서경덕(徐敬德)이었다. 뭇 사내들이 군침을 흘리는 대상이었으나 그녀 자신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몸부림친 외로운 여인이기도 했다.
어져 내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더냐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떠나는 임의 소매 자락을 붙드는 것은 전통 한국 여인의 모습이 아니다. 우리의 여인네들은 가슴이 아리면서도 속눈썹 내리깔고 말없이 임을 보낸다. 그리고 나서 외로움을 삭히며 그리워하고 한없이 기다린다.
위의 시조는 어느 국문학자의 말 마따나 가히 절창 중의 절창이다. 동서고금에 애인과의 이별을 노래한 시는 수없이 많지만 이토록 안타깝게 사모의 정을 표현한 시가 또 어디 있으랴.
또 시재(詩才)와 멋을 지닌 기녀는 황진이 말고도 매창(梅窓), 소맥주(少伯舟), 홍장(紅粧), 한우(寒雨), 명옥(明玉), 문향(文香), 다복(多福), 송이(松伊), 계랑(桂娘), 구지(求之), 천금(千錦) 등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므로 아름다운 기녀는 수없이 많았다.
선조때의 평양 기생 한우(寒雨)는 권세에도 재물에도 흔들리지 않는 기개있는 명기였다. 그런데 그 무렵 풍류재사로 일세에 이름을 떨치고 있던 임재(林悌)는 이 유명한 기생 한우를 꺾어 보기로 작정하고 어느 비 내리는 저녁 우장도 없이 한우의 집으로 찾아갔다. 온 몸이 비에 흠뻑 젖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으나 그는 가슴을 딱 펴고 한우의 집 대문 안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청량한 낯빛으로 낭랑하게 다음과 같이 시조 한 가락을 뽑았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없이 길을 나니
산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비로다.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한편 한우로서도 황진이의 무덤에 술을 부어 놓고 시조로 읊었던 일이 조정에서 말썽을 빚자 분연히 벼슬을 내던진 풍류객 임제의 소문을 듣고 있던 터이라 은연중 그의 풍모를 흠모하고 있었다. 그런던 차에 바람처럼 나타난 그의 중의법(重意法)을 써서 한 가락 멋지게 휘어치니 어찌 응답이 능청 휘어지지 않으랴.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로 얼어 자리
원앙침 비취금을 어이 두고 얼어 자리
오늘은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한우(寒雨)는 찬비다. ‘얼다’는 ‘교합(交合)하다’는 뜻의 옛말이다. 이쯤되면 풍류남(風流男)과 미녀기(美女妓)의 그날 밤 풍경이 어떠했으리라 짐작하기는 과히 어렵지 않다. 이처럼 이름난 기녀들은 권세나 보화로써가 아니라 풍류로써 함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그녀들은 기개나 높고 절개도 있었던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들 기생들 중에는 논개(論介), 계월향(桂月香), 홍랑(洪娘), 춘절(春節), 김섬(金蟾), 애향(愛香), 연홍(蓮紅)처럼 나라를 위해 자기 몸을 희생한 애국적이며 의로운 기생도 있었다.
평양 기생 계월향은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小西行長) 휘하의 부장에게 사로잡힌 몸이되어 수청을 들게 되었지만, 계교를 꾸며 순안조방장(順安助防將) 김응서(金應瑞)를 일본군 진지로 불러들여 왜군 부장의 목을 베고는 탈출케 하였다. 그런 다음 그녀 자신은 왜놈의 씨를 잉태한 자기 배에 담검을 꽂고 자결했다고 한다. 또한 너무나 유명해서 모르는 이가 없지만 논개는 진주성이 함락되자 전승 축하연에 참석하여 일본 장수 모다니무라노스께(毛谷村六助)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진주의 순의비(殉義碑)가 서 있으며, 시인 변영로(卞榮魯)는 그녀의 영전에 이렇게 시(詩) 한 수를 바쳤다.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사랑보다도 강하다.
아, 강남콩보다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기생조합 만세운동(妓生組合 萬歲運動)은 항일 독립투쟁사에서 유명한 사건이다. 이는 1919년 기생조합 소속 기생들이 전국 각지에서 전개한 일련의 독립만세 시위를 가리킨다.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자 진주, 수원, 해주, 통영 등지의 기생들은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통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3월 19일 진주에서는 기생독립단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촉석루를 향하여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에 일본 경찰은 기생 6인을 붙잡아 구금하였다는데, 이 중 한금화(韓錦花)는 손가락을 깨물어 흰 명주자락에 “기쁘다! 삼천리 강산에 다시 무궁화 피누나.”라는 글을 혈서로 썼다.
그리고 3월 29일에는 수원 기생조합 소속의 기생들이 검진을 받기 위하여 자혜병원으로 가던 중 경찰서 앞에 이르러 만세를 불렀다. 이들은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에도 경찰서 앞에서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이날의 주모자 김향화(金香花)는 일본 경찰에 붙잡혀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또한 4월 1일에는 황해도 해주의 기생 일동이 손가락을 깨물어 흐르는 피로 태극기를 그려 들고 거리로 나와 시위를 벌였는데, 이에 용기를 얻은 민중들이 가담함으로써 시위 군중은 3천명이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해주 기생 중에는 서화에 능숙한 기생조합장 문월선(文月仙)을 비롯하여 학식있는 여성들이 많았는데, 주동자 8명은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꿋꿋한 절의를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4월 2일에는 경상남도 통영에서 정홍도(丁紅桃), 이국희(李菊姬)를 비롯한 예기조합(藝妓組合) 기생들이 금반지, 금비녀 등을 팔아 광목 4필반을 구입하여 소복을 만들어 입고 수건으로 허리를 둘러맨 다음 태극기를 들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이 중 3인은 6개월 내지 1년의 옥고를 치렇다.
나라를 위하는 일에 어찌 양반과 평민의 차이가 있을까마는 평소 설움만 받아 오던 하층민이 이처럼 구국 대열에 목숨을 걸고 나섰다는 것은 더욱 값지고 숭고하다. 아마도 애국 기생들은 이들만은 아니었으리라. 다만 이름을 알지 못함이 안타까울 뿐이다.
기생은 전통 사회에서 잔치나 술자리의 흥을 돋우기 위하여 제도적으로 존재했던 특수직업 여성으로서, 일종의 사치노예(奢侈奴隸)라고 할 수 있다. ‘기녀(妓女)’ 또는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라는 뜻으로 ‘해어와(解語花)’라고도 불리며, ‘화류계(花柳界)’라고도 한다. 그럼 기생은 언제 생겼을까?
문헌상으로 살펴보자.우리나라 최초의 기생은 김유신이 한때나마 사랑에 빠졌던 천관녀(天官女)가 될 것이다. 김유신은 부모의 꾸지람을 듣고 깨달은 바가 있어 천관녀와의 관계를 단호하게 끊었다. 그런데 평소 김유신이 늘 타고 다니던 애마(愛馬)는 주인의 이런 비장한 마음도 모르고 유신이 술이 취해 말 위에서 조는 사이 예전처럼 천관녀의 집으로 유신을 데려갔다. 잠에서 깨어난 유신은 죄없는 애마의 목을 그것도 천관녀가 보는 앞에서 칼로 내리쳤다. 이때 천관녀는 어떻게 하였을까? 목석같이 가만히 서서 눈물만 흘렸을까? 소리를 지르며 방방 뛰었을까? 그녀는 한동안 자기 품에서 도취한 몸짓으로 사랑을 갈구하던 유신이 이처럼 냉정해진 것을 보고 원망의 시를 짓고 거기에다 곡을 붙여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는 자기가 살던 집을 헐고 절을 지은 다음 스스로 중이 되어 지내다가 아픈 사람의 추억을 안고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이 절 이름을 천관사라 불렀다 한다. 일설에 의하면 천관녀는 본디 절에 있던 노비로서 매음한 것이라고도 하나, 시를 짓고 절을 지은 것으로 보아 단순한 창기로 보기는 어렵고 미모와 음률에 뛰어난 명기(名妓)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명장(名將)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겠는가.
이익(李瀷)은 그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기생은 양수척(揚水尺)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양수척이란 고려에게 망한 후백제의 떠돌이 망국민(亡國民)들로서 버들가지로 키나 소쿠리를 만들어 팔러 다녔으며, 사냥과 간단한 농사로 연명하는 불쌍한 집단이었는데 이때 여자들은 더러 몸을 팔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솜씨있는 기술 예능인을 ‘척(尺)’이라 하였으니 양수척은 최하급 천민에 속하였다. 후에 나라가 안정되자 고려 조정에서는 이들 양수척을 노비(奴婢)로 삼고 읍적(邑籍)에 올렸는데, 이 중 용모가 고운 여자를 골라 춤과 노래를 익히게 하여 기생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의 양수척에서 기생이 다 나온 것은 아니고, 이전부터 있었던 기생에다가 양수척을 보강하여 기생을 양성하여 궁중의 연회에 사용하였다. 따라서 재주가 뛰어나고 미모가 출중한 기생은 많은 관리들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고, 왕의 총애를 받아 옹주(翁主) 칭호를 받는 기생도 생겼으니, 고려 최씨 정권 때의 실력자 최항은 기생 서련방(瑞蓮房)의 아들이었다.
기생의 발생을 무녀(巫女)의 타락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곧 고대 제정일치(祭政一致) 사회에서 사제(司祭)로 군림하던 무녀가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력이 분화되는 과정에서 기생으로 전락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원래부터 세습되어 내려온 기생 외에도 비적(婢籍)으로 떨어져 내려와 기생이 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역신(逆臣)의 부녀자들이다. 고려시대에 근친상간의 금기를 범한 상서예부시랑 이수(李需)의 조카며느리를 기생호적에 올린 경우와, 조선 초기 사육신(死六臣)의 처자를 신하들에게 나누어준 경우가 대표적 예이다.
이인로(李仁老)의 「보한집(補閑集)」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어떤 고을 태수가 사랑하는 기생을 두고 다른 지방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이별의 술잔을 주고받던 날 밤 태수는 술에 취하여 “어허 요렇게 이쁜 나의 애인이 내가 떠나고 나면 다른 놈 품에 안기겠지. 그럴 수 없어. 그건 안돼.”하면서 달궈진 인두로 어여쁜 기생의 얼굴을 지지고 말았다. 후에 시인 정습명이 이 기생의 흉한 얼굴을 보고 불쌍히 여겨 시를 하나 써 주었다.
많고 많은 꽃 중에 가장 예쁜 꽃 한 송이
미친 바람 홀연 불어 고운 꽃잎 찢었네.
아름다운 저 얼굴 어이할거나
볼수록 저며오는 안타까움 그리움.
그 후 이 소문을 듣고 시를 보러 오는 사람이 꼬리를 물게 되고, 기생의 애처러운 모습을 본 내방객들은 성의껏 돈을 놓고 갔다. 이리하여 이 기생을 굶지 않고 짐승처럼 ‘휵양’한다고도 한다. 또 방기(房妓)라 하여 사대부집에서는 전속 기생을 두기도 하였다.
그러나, 고관(高官)이 사랑하는 기생은 그 세력 또한 당당하였으며 아무나 함부로 얼씬거리지 못하였다. 그러한 기생의 대표격으로 나합(羅閤)이라는 기생을 소개한다.
구한말 순조에서 고종때까지 김씨세도가 위세를 떨칠 때의 이야기다. 김좌근은 본처 윤씨에게 소생이 없자 오래전부터 사랑해왔던 기생 양씨를 소실로 맞이했다. 이 양씨가 바로 나합(羅閤)이다. 나합이라는 말은 양씨가 본디 전라도 나주 출신의 기생이었기 때문에 나주에서 ‘羅’자를 따고, 김좌근이 영의정이었으므로 영의정을 달리 이르는 말 ‘영합’에서 ‘閤’자를 따서 만들어진 말이다. 따라서 나합이란 나주 기생이 영의정을 주무른다는 뜻이고, 실지로 이 나합은 조정을 좌지우지 하는 실력을 행사했다. 그리고 매관매직에 깊숙히 관여했다. 이리되니 기생 정치를 규탄하는 백성들의 원성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세상에서는 ‘閤’자를 ‘조개 합(蛤)’자로 고쳐 나주 조개라는 뜻으로 ‘羅蛤’이라 풍자하기도 했으니, 조개의 상징적 의미가 자못 재미있다.
나라 안에 기생에 대한 소문이 나빠지자, 기생 출신으로 어느 말단 관리의 첩이된 한 여자가 하루는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이 나합을 찾아갔다. 그녀는 나합을 만나자마자 대뜸 “천한 기생 출신으로 정승의 첩이 되었으면 얌전하게 집안일이나 살필 것이지 건방지게 나라를 썩게 만들다니… 에이 더러운 년!”하고 호통을 친 다음, 자기 집으로 돌아와 남편에게는 “용서하십시오. 제가 떠나야만 당신이 무사하십니다.”하고는 훌훌 가정을 떠났다. 그리고는 먼 곳으로 옮겨가 어려운 기생들 뒷바라지를 하며 평생을 홀로 조용히 살았다고 한다. 이쯤되면 기생의 자긍심과 오기도 어지간하다 하겠다.
어찌되었건 나합의 경우는 ‘기녀 재상’이라 할만하다. 원래 기녀 재상이란 연회때 뛰어나게 활약한 공로로 정 3품인 통정가자(通情加資)나 정 2품인 가선가자(嘉善加資)를 제수받은 기생을 일컫는 말이었다. 따라서 기녀가 고관처럼 금관자, 옥관자를 단 셈이 되므로 진사 정도는 우습게 보았다.
이성계가 군사 쿠데타로 고려 정권을 무너뜨리고 조선을 건국했을 때의 일이다. 궁중에서 베풀어진 주연석상에서 개국공신이 배극렴이 미색과 기예와 재치를 고루 갖춘 설매(雪梅)라는 기생에게 농을 걸었다. “듣자하니 너희들은 지조가 없어서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는다던데, 오늘 밤에는 내 품에 안김이 어떠할까?” 그러자 설매는 눈을 내리깔고 잔잔히 웃으며 “네, 그렇게 하지요. 이 품 저 품 지조없이 옮겨 다니는 제가 고려 품에도 정승이요 조선 품에도 정승인 대감 품에 안긴다면 얼마나 딱 어울리겠어요?” 곁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좌중은 이내 웃음바다가 되었고, 배극렴의 얼굴은 홍당무가 되었다. 참으로 용기있는 기생이라 아니할 수 없다.
조선 중기 노진이라는 사람이 공부할 밑천을 얻으러 전라도 남원에서 평안도 선천에 사는 당숙을 찾아갔는데 문전박대만 당하였다. 이때 어떤 기생이 도와주면서 열심히 공부하여 꼭 출세하라고 하였다. 3년 후 과연 노진이 과거에 급제하여 그 기생을 수소문 하였다. 그런데 그 기생은 3년 전 산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이다. 노진은 먼 길을 재촉하여 달려갔다. “정말 노도령이신가요?” “그렇소. 당신의 소원대로 과거에 급제했소.” 비구니는 법당 안으로 들어가 부처님 앞에 무릎을 끓고 합장하였다. 한줄기 눈물이 그녀의 고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노진이 기다리다 기다리다 지쳐서 절문을 나섰을 때에야 비구니는 천천히 일어나 먼산으로 눈길을 모두어 보냈다. 실로 아름다운 이야기다.
일제시대 어느 친일파 인사가 거금을 주고 당시 이름난 요정인 명월관(明月館)의 진주 기생 산홍(山紅)을 소실로 삼으려 하였다. 이때 산홍은 이 돈을 홱 뿌리치며 날카롭게 꾸짖었다. “기생에게 줄 돈이 있으면 나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 그 의기가 참으로 놀랍다.
기생은 노비와 마찬가지로 한 번 기적(妓籍)에 올려지면 천민이라는 신분적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양반 아버지와 기생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경우라도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에 따라 아들은 노비, 딸은 기생이 될 수밖에 없었다. 춘향이가 바로 그런 경우다. 양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나 춘향이의 신분이 천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생이 양민으로 되는 경우도 있었다. 즉 속신(贖身)이라하여 양반의 소실이 되는 경우 재물로 그 대가를 치러줌으로써 천민의 신분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한편, 기생이 병들어 제 구실을 못하거나 늙어 퇴직할 때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나오는데 이를 대비정속(代婢定屬)이라 한다. 고전소설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에는 양반의 딸이 아버지의 빚을 갚아주기 위해 기녀가 되는 이야기도 나온다. 어쨌든 기녀는 조선사회에서 팔천(八賤)의 하나였다. 다만 그들에게 위안이 있다면 양반의 부녀자들과 같이 비단옷에 노리개를 찰 수 있었던 점, 직업적 특성에 따라 사대부들과 자유로운 연애가 가능했다는 점, 혹 고관대작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면 친정을 살릴 수 있다는 점 등일 것이다. 그러나 신분적 제약으로 인해 이별과 배신을 되풀이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말기에 이르면 기생이 일패(一牌), 이패(二牌), 삼패(三牌)로 나뉜다. 일패기녀는 관기(官妓)를 총칭하는 것으로 예의범절이 밝고 대개 남편이 있는 유부기(有夫妓)로서 몸을 내맡기는 일을 수치스럽게 여겼다. 이들은 우리 전통가무의 보존자이며 전승자로서 뛰어난 예술인이었다. 이패기녀는 ‘은군짜(隱君子)’라고 불리는데, 음률도 갖추고 고상한 멋도 풍기면서 남성을 유혹하는 교태가 뛰어나 밀매음녀(密賣淫女)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리고 삼패기녀는 이른바 창녀(娼女)로서, 술이나 팔고 남성의 육체적 노리개감이 되는 저급 기생이다. 대원군은 이렇게 기생 등급을 정하고, 일패는 가마 타고 다니고 이패는 걸어다니며 옷은 각각 어떻게 입어야 한다는 등 규범까지 정하였으나, 누가 다같은 기생 처지에 이런 차등을 드러내고 싶을 것인가? 따라서 실제로는 구분이 어려웠고 게다가 한일합방 후에는 아예 없어지고 말았다.
수원에서 밥술이나 먹고 사는 집 아들이 많은 돈을 가지고 서울 행차를 했다. 남자의 본능적 욕구에 어쩌다 기생의 남편이 되어 돈을 다 탕진한 후 기녀에게 절대로 다른 남자를 보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그것도 미심쩍어 맹서문을 손에 받아 쥐고 돌아왔다. 그런 다음 여기저기 애써서 겨우 돈을 만들어 가지고 사랑했던 기녀에게 다시 돌아와 보니 어느 새 그 기녀는 다른 남자의 품에 안겨서 갖은 교태를 다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를 본 수원 사람은 분기탱천하여 서로 약속하며 나누었던 사랑의 맹서문을 꺼내놓고 이럴수가 있느냐고 대들었다. 그랬더니 아하 그 기녀 왈 “이제 보니 당신은 수원 나그네구먼. 기생에게 맹서문이 무슨 말라비틀어진거야? 저기 구석에 있는 보따리에서 당신 맹서문 찾아가구려.”하고 대수롭지 않게 얘기하며 새로운 남자의 겨드랑이 밑으로 얼굴을 비벼대는 것이었다. 이런 연유로 요즘 사람도 여자에게 미쳐서 어리땡땡한 친구를 수원 나그네라고 한다.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따르면, 기생이 잊지 못하는 다섯 남자가 있다. 첫경험을 안겨준 남자, 멋지게 생긴 남자, 힘이 센 남자, 돈이 많은 남자,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아주 못생긴 남자를 잊지 못한다고 한다. 수없이 많은 남자를 상대하다 보니 어찌 평범한 남자까지 다 기억할 수 있으랴?
기생은 숫처녀일 적, 이른바 동기(童妓)때에 머리 올려준 남자를 가장 못잊어 한다. 머리를 올려준다는 것은 시집보내 준다는 뜻이며, 이 때의 해옷값은 무척 비쌀수 밖에 없다. 그러나 돈많은 한량들은 해옷값을 펑펑 쓴다.
기생은 성(姓)이 무시되고 이름만 불린다. 설매, 계월향, 솔이, 매창, 자동선, 한우 등등 이름있는 기생들의 성씨도 전혀 알 수가 없다. 천한 신분에 부모의 내력까지 드러내기도 뭣하고, 또 뭇남성들을 상대하는 처지에 한참 분위기 익혀놓고 동성동본이라고 한다면 서로가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어차피 노류장화(路柳墻花)인 것을 복잡하게 이것저것 따질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기생은 성씨를 밝히지 않았고 묻지도 않았으며, 꼭 알아야 될 경우라도 어느 지방 출신의 아무개라고만 하였다. 그런데 특이한 예로 성춘향과 황진이가 있다. 이런 점에서 춘향과 진이는 일반기생과 차원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신분은 낮았지만 위로는 임금에서부터 관리, 양반, 풍류객, 평민까지 접촉하면서 기예와 풍류로 역사의 뒤안길을 장식했던 여인들 그녀들은 몸과 재주를 바탕으로 뜨겁게 살다간 열녀(熱烈)들이다. 그리고 그들은 독특한 기생 문화를 형성하면서 뭇 나비들의 꽃이 되어 주었고, 찬란하면서도 아릿한, 슬프고 안타까운 갖가지 사연들을 우리의 민속문화 속에 남겨 놓았다. 누가 그들을 향하여 손가락질을 할 것인가? 우리는 그녀들의 삶과 사연을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살필 수 있고 민속과 예술의 한 단면을 진솔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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