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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문예/나은 김우영작가

[스크랩] 명기 홍도

매트메니저 2007. 5. 24. 18:52

名妓 紅桃」을 그리며

홍도 비석이 허리잘린 사연의공간



                      작가 김우영

   


지난 어느 시기에 명기 홍도(紅桃)의 묘비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1930년대 신파극의 대표적인 히로인 홍독사 사실은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원래 그런 이름의 명기가 있었기 때문에 생겨난 극중 주인공이라는 식의 화제였다.

  가만히 따져보면 이런 식의 이야기는 야사에 가까울수도 있다.홍도는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하는 화류계 출신이고 화류계에 진출하려면 옛날 기생 이름을 따는게 관례처럼 되어 있었으니, 변사또의 수청기생 정도만 귀여겨 들어도 찾아질 수 있는 홍도를  작가들은 주인공 이름으로 채택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조선조의 기생 홍도가 그 모델이기라도 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거리가 멀다.

  

 

이렇게 명료한데도 미디어마다 이 뉴스를 상당한 크기의 지면을 할애하며 소개하고 있다. 제목도 “조선기생 홍도는 실존인물”하는 식으로 붙여서 사긴 곁들여 큼직큼직하게 소개했다. 왜 그랬을까. 홍도에 대한 관심이 왜 그리 높은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새로 발견한 명기의 존재와 행적때문이었던 것 같다. 명기라는 말에는 호방한 남성문화가 살아있기 때문인것 같다. 요즘처럼 왜소해지고 위축된 시대의 남성들에게는 아득한 전설처럼 들릴 그런 문화이기 때문이다.

 

 

  새로 발견되었다는 홍도의 묘비는 남성들의 마음속 낡은 창고속에 먼지를 쓰고 망각되어가던 어떤 정서를 들춰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잡초가 무성히 자라 돌보는이 없어보이는 스산한 무덤앞에 가운데 머리께가 딱 잘린채 눈길을  끌게하였다.    특히 당대의 지방 문장가와 풍류객들이 비문을 쓰고 모금을 해서 세웠다. 그들은 어떤 풍류객들이었을까. 문득 떠오르는 시조 한 수.

 

 

   “靑草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紅顔은 어디두고 白骨만 묻혔는다/잔 잡아 권할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선조때 문인 임제의 시조다. 뛰어난 문장가요 기개있는 선비였던 그가 천하 명기 황진이의 무덤앞에서 읊은 시조이다. 벼슬자리에 부임하러 가던 길에 이 시조를 써서 읊은 그는 신성하게 사도에 임해야 국봉받는 선비가 한낱 천기 무덤앞에서 함부로 문장을 농했다고 해서 이후에 불이익을 당했다는 일화가 따른다. 유난히 규율과 규범이 엄격했던 것이 선비들의 삶인데 비문에 당당히 이름을 새겨넣어가며 기생을 찬양해 놓은 이 홍도의 비는 꽤 흥미롭다.

 

 

  더구나 이 비석은 사진으로 보아서는 허리께가 딱 잘려졌음을 보여준다. 더러 금이 가는 수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딱 잘린 것은 아무래도 누군가가 심술삼아 잘랐던 것 같아 보인다. 풍류로만 떠도는 지아비를 둔 어느 양반집 내당여인이 누군가를 시켜 잘라 놓은 것은 아닐까 하는 앨궂은 상상도 해보게 하는 몰골이다.

 

 

  우리네 어머니, 할머니께서는 딸들을 나무랄 때 입버릇처럼 기생을 들먹이셨다.

   “니가 기생이냐, 버선을 지루신게?”

   “상스럽게 반절을 하면 못쓴다. 기생이나 그런 절을 하느니라!”

   “망측스럽게 치마를 외루 입었구나. 기생이나 그렇게 입는 법이니라!”

 

 

  조선조 기생은 백정․장인․민중과 함께 낮은 신분에 속했었다. 관가에 기적(妓籍)이 매어 있어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종과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그렇게 낮은 신분이면 양반집 내당마님들은 경멸만 하면 그만이었을터인데 사사건건 빗대어가면서 기생을 득먹여 빈정거리는 대상으로 삼았던 것을 보면 기생이라는 존재가 사대부가의 아낙들에게 끼쳤던 심리적 갈등이 예사롭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의 영웅 호걸이라도 눈이 멀어 녹아나는 것은 기생첩이었다. “권련의 마지막 한 대”를 아낀다는 뜻으로 “기생첩도 안준다”는 말도 있다.

 

 

  남성들이 애지중지할 수 있는 상징의 집약이 기생이었을터인즉, 임금의 장인께 사랑받으며 만고의 호강을 다했을 기생 홍도가 자유로운 새가 되어 낙향을 즐기는 모습은 규방 깊숙히 갇혀 사는 내당마님들에게는 눈허리가 시었을 게 뻔하다. 게다가 아무리 명문가의 며느리가 되어도 죽은 뒤에 아녀자의 무덤앞에 비문같은 기념비가 세워질 수는 없다. 더구나 글을 읊는 호걸 한량들이 문장을 지어 바치는 명예로운 대접은 받지 못한다. 홍도 묘비의 허리를 자르고 싶은 심경을 가진 양반가의 부인들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경북 경주시 도지동 야산에서 발견된 조선시대 기생 홍도의 잡초무성한 무덤과 비석이 화려하게 화제를 뿌리게 된 까닭은, 웬만하면 남성이 영웅 호걸이 될 수 있었던 옛날에 대한 향수때문이 아닌가도 싶다.

  서양의 기사도가 아름다운 숙녀에 대한 존경을 척도로 했듯이 동양의 영웅을 구성하는 조건도 미색에 있었다.

 

 

  그리고 홍도는 살롱문화의 여주인처럼 풍류객들의 대모(代母)노릇도 했던 모양이다. 이를테면 경주가 낳은 「조르주 상드」쯤 된다. 그런 여인을 향한 찬사를 보낸다면 필자 특유의 풍류성일까.

  10여년전 일본에서는 이제는 고인이 된 전직 수상이었던 거물급 정치인이 자신의 소첩이던 여인의 죽음을 맞아 영정을 들고 장례식에 참례하여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그런 그를 가리켜 “최후의 명치인”이라고 표현한 것을 읽은 적이 있다.마돈나선풍을 일으키며 새 수상감이 나오는 족족 “스캔들” 방망이를 휘두르는 일본여성들의 힘을 보며 “최후의 명치인”이라는 말의 탁월한 지적을 다시 음미하게 되었었다. 천한 신분의 기생들 사이에서 원석(原石)하나를 찾아내어 명기로 탁마해 놓고 호방하게 천하를 논하던 조선시대의 사대부를 생각하노라면 우리 남성들은 오늘의 자신들이 좀 작아진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홍도비석의 전말”이 그런 것 이었던 듯 여겨진다. 시대는 한참 변했고 남성들에 의해 “히로인”이 만들어진던 시대도 이제는 가버린 것 같다. 아무리  아쉬워하고 쓸쓸해 해도 변하는 것은 어쩔수가 없다. 안됐지만 그것이 오늘의 현실인 것을...


(다음호에)

출처 : 그린파워/녹즙/문학/수액시트/생즙기/석류/금매트
글쓴이 : 늘풀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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