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초여름날 읽어보는 나은 작가의 어느해 겨울 이야기
오너 드라이브 엣세이 - 4
- 첫 출근을 하며
작가 김우영
이 겨울
눈은 내리네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서리 또한 그윽하므로
내 이마를 숙이고 빌까 하노라
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들이나니
그대 또한 저 눈을 사랑하노라
눈은 내리어
우리 함께 빌 때러라.
-시인 박용철의 ꡐ눈은 내리네ꡑ 全文
'눈 과 '사랑'은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하게 못잊을 소중한 배갯잎 추억 같은 거라고 했던가!
瑞雪이 하이얗게 내리는 날 아침. 시골집 앞 냇가에서 친구들과 엉덩이 방아를 찧으며 미끄럼을 타던 일, 첫 눈이 수북하게 쌓인 장독대를 지나 마을의 형아들과 뒷산에 올라 털모자를 푹 눌러 쓰고 워이이-- 위이이-- 하고 ‘겨울산 토끼몰이’ 를 하던 유년시절의 추억은 눈물겹도록 그립고 잊지를 못하고 있다.
또한 지금은 어느 하늘 아래서 살지 모르나 어느 여인과 가졌던 설레이던 첫 키쓰, 몸서리 쳐지도록 가슴 저린 첫 정을 나누던 그 여인은 어느 하늘 아래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 . . . . . 40대 중년으로 아이 엄마가 되어 세월의 주름 위에 떨구어진 지난날들을 회상하고 있을까. 그렇게 죽자 살자 좋아했던 첫 사랑의 감동스런 결 고운 추억의 낙엽 위 잎새에 사연들, 바닷가에서 밀려 왔다가 다시 도망가는 泡沫의 물결 같은 지나간 일들 . . . . . . .
새해 들어 충남 연기군 조치원읍에 소재한 초등학교로 직장의 인사 발령이 있었다. 첫날 발령 사령장을 받기 위해 대전 문화동 집에서 조치원으로 가기 위해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을 나섰다. 집 앞 골목에 주차한 ‘나의 사랑, 나의 오너 드라이브의 주인공’ 인 '아반테 승용차'에 시동을 걸었다.
추운 겨울 날씨 탓에 승용차 안이 냉랭했으나 늦기 전에 미리 출발해야 하다는 아내의 염려 덕분에 미리 집을 나섰다. 집을 출발하여 부근에 있는 대전 안영 인터체인지에 접근을 했다. 원래의 행선지는 호남고속도로로 가다가 경부선 상행선으로 길을 바꿔 가다가 충남 조치원으로 가야 했다. 그러나 고속도로 행선지 좌표를 잘못 보고 차량 진입을 하는 바람에 대진(대전. 진주)고속도로로 요놈에 '아반테' 가 길을 잡는 게 아닌가. 허허, 조치원이 아닌 경남 진주 대구 방향으로 말이다.
"야이, 요 눔아 . 그 곳이 아니야? 주인장인 내가 갈 곳은 조치원이야. 아침 저녁으로 새가 하천에 내려 앉았다는 넓으런 들녘의 고장, 복숭아의 고을 조치원이야 조치원."
인터체인지에서 부터 잘못 길을 잡아가던 나의 사랑 아반테는 급히 남대전 판암 인터체인지에서 경부고속도로로 回行 하여 가까스로 거꾸로 상행선을 달리기 시작했다. 시간은 가고 낯설은 첫 출근길에 마음이 이제 급했다. 그러나 거대한 레일로드 같은 고속도로 위에서 앞차가 빠져야 뒤 따라 가는 것 인걸 어찌하랴 싶어 천천히 차창 밖을 구경하며 ‘오너 드라이브 엣세이’ 에 몰입을 했다.
아침 출근길 고속도로인데도 많은 차량들이 고속으로 달리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는 겨울속 雪中雪山의 신비한 진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사이 사이로 저 멀리 늘어선 산능선이 아스라이 시야에 잡힌다. 산 중턱께로 기러기 떼 한 무리가 字型을 이루며 날아가다가 허공 속으로 시나브로 사라진다. 차를 몰면서 생각했다. 직장생활을 하겠다고 이곳 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던 지난 날 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문학할동을 함께 하던 아내 (당시 미스 김)와 연애결혼을 하고 아이들 셋을 낳고서 한 번 잘 살아보겠다고 발을 내디딘 공직생활. 순간순간 닥쳤던 위기와 갈등, 고뇌 등을 삼키며 ‘요놈에 직장생활을 언제 까지 할 것인가?’ 하며 갈등과 번민으로 점철되었던 시절이 벌써 20여년을 앞두고 있다.
1988년 충청남도에 채용되어 첫 발령을 충남 당진군으로 받았다. 고향인 서천을 떠나 소설가 심훈의 상록수가 있고, 면천의 두견주가 김 처럼 서려 있는 당진읍내에 보증금도 없는 先 월셋방을 한 칸 얻어 서러운 셋방살이가 시작되었다.
당진의 남산 아래에 있는 허술한 슬레이트 단칸방에 아이 셋과 아내 누우면 방안이 꽉 찼다. 밤중에 화장실을 갈 때면 방이 비좁아 가족들의 다리를 한쪽으로 치우며 밖에 나가야 했던 가슴 저린 가난하고 힘들었던 당진에서의 햇병아리 시절. 이어서 2년여 만에 푸르런 아산만과 현충사가 있는 아산군으로의 전출을 했다. 뜨거운 온천수와 인정이 있는 온양에서 살가운 정이 들기 시작했다. 사통팔달로써 교통이 좋아 서울과 전국이 좁다 할 정도로 동서남북으로 각종 문예강좌를 다니며 문인들과 즐겁고 보람된 삶을 만끽했
다.
그리고 이어 예산군으로 발령이 났다. 빠알간 사과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예당저수지가 있는 예산에서의 생활도 퍽 운치가 있고 재미가 있었다. 다시 승진을 하면서 아산시로의 전입을 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야간에 서울로 다니며 대학원 학업을 마치는 보람도 있었다.
그러나 이때 나에겐 로스탤지어라는 고향 회귀병이 발병을 하기 시작했다. 이곳 저곳으로의 객지생활이 너무 서러워 고향 서천으로 가고자 했기 때문이다. 고향산천이 그립고 부모님과 형제가 있는 고향으로 이사 가기 전 날 밤 . 아내와 아이들은 뎅그라니 쌓아놓은 이삿짐을 방 가운데 놓고 나의 바지깃을 부여 잡고 울먹였다.
"여보, 남들은 빽을 써서라도 큰 도시로 나오는데, 왜 하필 서천 같은 시골로 낙향이예요?"
"아빠, 우리는 왜 이사만 다녀야 되요. 학교에서 친구들을 못사귀겠어요. 정이 들만하면 이사하는 바람에 . . . . . . "
"흐으윽-- 흐으윽--"
"여보 다시 한 번만 생각을 . . . . . . "
". . . . . . . . . !"
서양의 철학자 ‘로만’은 말했다. ‘결단과 결심은 쾌난도마 처럼 빠를수록 좋다‘고 . 고향이 그리워 내 땅에 가서 살겠다며 아내와 아이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은빛물결의 금강과 서해바다가 누워 있는 고향 서천으로 기어히 이사를 했다. 그곳 서천군청에서 4년여 되었을까 . . . . . . 후회를 하기 시작했다.
큰 딸 '바램이'가 여고 3학년으로써 대학을 진학하여야 했기에 큰 도시로 다시 가야 한다며 아내의 성화가 시작되었다. 또 둘째 딸인 '나아' 의 건강을 위해서도 그렇고, 막 자라고 있는 끝동이 '민형'이를 위해서도 대전으로의 이사가 불가피 했다. 또한 내가 활동하고 있는 작가의 창작무대도 시골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고향이라는 어떤 어려운 환경이 오히려 시일이 지날수록 어두운 장애가 되고 있었다.
2001년 9월 가을. 오색단풍이 대둔산 자락에 울긋불긋하게 옷을 입히던 때에 기어히 시골로 정착하고자 했던 나의 마음을 바꾸어 씁쓰레한 마음으로 다시 도시로 나왔다. 아내와 아이들은 두 손 들어 환영을 했다. 온 가족이 좋아했다. 그러나 나의 마음 한 구석엔 어떤 씁쓰레한 그 무엇이 침잠하고 있었다.
일반직에서 쌓은 15여년의 경험과 주변을 과감하게 접었다. 머지 않아 있을 영전과 명예를 한 순간 접고 가족과 나의 ‘어떤 나?’ 나를 위하여 교육직으로의 전직시험을 거쳐 드디어 합격을 하고 충남 금산의 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
그러다가 다시 오늘 2003년 1월 2일 충남 연기군의 초등학교로 다시 발령을 받아 첫 출근길에 나선 것이다. 인생의 중반 간이역 40대 불혹의 나이에 ‘김우영의 설레임 엘레지’가 시작된 것이다.
부평초처럼 객지로 객지로만 떠돌며 가족 피붙이들과 함께 옹색한 가정살림에 10여회의 이사를 다녀야 했던 지난날들. 이삿짐이래야 별로 없지만 책으로 가득한 타이탄 트럭을 타고 이사를 다니며 살았던 일들은 참으로 생각하면 할 수 록 처연하고 힘들었던 시절이었다.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면서 그 지역 풍광과 역사에 취하고 지역의 향토문인들과의 흐믓한 문학에의 교류와 열정, 보람된 인간 관계 등을 가졌다. 이런 일은 지금껏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젊은 날의 추억으로 一葉便松이 되어 저 강가로 흘러가듯 떠나가고 있다. 지나간 일들은 늘 사람을 애잔하게 하고 그립게 하듯이 말이다.
지나간 갖은 상념으로 아반테 승용차를 30여분을 달렸을까 처음으로 와보는 청주. 조치원 인터체인지가 나온다. 충북 청원군 강내면 다리를 건너 강외면을 가로 질러 조치원 읍내로 향하였다. 강내면 하면 떠 오르는 한 분이 있다. 나를 지금의 작가 반열로 올려 놓는데 첫 길을 터 주신 한국교원대학교의 성기조 박사님이시다. 지금은 퇴직을 하고서 한국 문인들의 권익보호와 위상을 세계적으로 드높는데 힘을 쓰고 계시는 국제 펜 클럽 한국본부 회장으로 분주하게 서울에서 활약하고 계시다. 성 박사님이 한국교원대학교에 재직중이일 때 나에게 수시로 책을 보내주시고 격려의 서신도 주셨다. 그 분이 한동안 사셨던 고장 충북 강내면 다락리 옆을 나는 지금 지나고 있는 것이다.
아침 출근길에 낯선 곳에서의 지리적 탐색에 애 태울 때 쯤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이곳 조치원의 문인이자 엽서문학의 발행인 조재구 시인이다. 어려운 목수라는 직업을 가지고 노동현장을 누비면서도 매월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발행하는 엽서문학으로 전국적으로 지명도를 높히고 있는 근면 성실한 분이다. 雲木 조재구 시인게게 전화를 걸었다.
"운목 선생님. 교육청 가는 길이 어딘지 알려 주세요?"
"예, 알았습니다. 나은 선생. 조금만 기다리세요. 곧 나가서 첫 부임차 오는 나은님을 임지로 자세하게 안내하리다."
잠시 후 부시시한 운동복 차림으로 나타난 운목 선생의 안내로 교육청을 쉽게 찾았다. 그리고 사령장을 받고 다시 조치원읍 명리에 위치한 초등학교로 향하였다.
이곳에서 또 얼마나 살 것인가. 내가 머물고 살아가야 이곳은 대전으로 진입하는 산업도로를 옆에 두고 조치원중앙시장이 있는 아늑하고 조용한 학교였다. 우선 교감선생님을 뵈옵고 잠시 후 교장 선생님과 함께 만남을 축하하는 점심 식사를 하였다.
그리고 맡은 바 본연의 업무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나의 2003년 첫 출근, 첫 업무가 시작된 것이다. 21세기 새해 2003년 첫 일과가 대한민국 연기군 조치원 땅에서 첫 발을 내딛고 저 대지를 뒤덮은 하이얀 瑞雪처럼 일과를 시작한 것이다.
첫 날 첫 눈과 함께 첫 사랑처럼 설레이게 시작한 나의 길 따라 나선 길. 나의 길은 어디서 시작하여 어디로 가는 것일까. 끝없이 길게 내쳐진 이 길처럼 한없이 가야 하는 나의 길은 어디일까 .
곧게 뻗은 고속도로처럼 시작도 끝도 없는 내 인생의 길을 어드메쯤 가고 있을까. 도대체 어드매쯤일까 . . . . . . 저 눈은 너무 희고, 저 눈의 서리 또한 그윽하므로 오, 임이여 설운 빛이 그대의 입술을 물 들이나니 . . .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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