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女俗
한 번籍에 오르면 못벗어나 代물림
黃眞伊-李梅窓 등 뛰어난 詩人많아
작가 김우영
妓女, 일명 妓生은 봉건사회가 낳은 일종의 사치노예다.
사치노예인 점에 있어서는 궁녀도 마찬가지지만 궁녀와 기녀는 일반의 인식도 그렇고 그 身分에서 오는 모든 여건이 그야말로 하늘과 땅이다. 妓는 원래 婢와 같은 부류로 新羅 金庾信이 젊었을 때 사권 「天官女」도 天官寺의 寺婢다. 寺婢는 寺奴와 더불어 민간에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과정에서 遊女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 남아 있는 高句麗 舞踊家 벽화속에 男女가 손목에 한삼을 끼고 춤추는 장면을 보더라도 高句麗 때 이미 직업적인 광대와 유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이웃나라 문헌에도 高句麗 遊女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後韓書」 및 「隋書」). 유녀나 妓女는 본질적으로 같은 계열으로 본다.
官奴제도는 高麗때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高麗史」藥志나 「翰林別曲」 등에 나오는 帶御 香 月精花 등의 이름과 각 道에서 뽑아올린 기생들과 城中官妓들로 구성된 男粧隊의 정체가 바로 그것을 뒷받침한다.
11세기 文宗때 八關會나 燃燈會같은 국가적 행사때 「처음으로 女樂을 썼다」하니 국문학사상 珠玉같은 「고려가요」의 전도자는 바로 妓女인 셈이다.
조선조가 고려의 官妓制를 이어받은 것은 물론이다. 官妓는 京妓와 고을妓(地方妓)로 나누어지며 京妓의 전성시대는 연산군때이다. 採靑使를 두어 전국에서 자색있고 재주있는 소녀들을 뽑아올려 「運平」이라 불렀다. 연산군 10년이후에는 그 수가 3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地方妓는 감영 府 色牧 縣마다 定數가 있었다. 최하 縣의 20명에서 최고 平壤 감영의 2백명까지 전국적으로 그 수는 京妓까지 합해 3만명을 헤아렸다. 京妓는 그후 2백명 가량으로 줄어 官中 內醫院(일명 약방) 소속 80명과 工曹 尙衣院에서 바느질을 맡은 針線婢 1백50명 등 모두 2백30명 정도였다.
「약방기생」은 침술을 배웠기 때문에 평소에는 궁중에서 간호사 혹은 助産員노릇을 하지만 국가적 잔치(進晏進豊呈같은)때는 ?姬歌姬로 바뀐다.
기생의 停年은 50세이며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물러나야 한다. 이것을 大妃定屬이라 한다. 기생은 奴婢와 같이 한 번 妓案에 기록되면 贖身(또는 贖良 - 몸값을 빼줌)되기전까지는 天刑과 같은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춘향이 변사또에게 반항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솜털도 안가신 16세 少年 이몽룡이 부모 몰래 춘향을 속신시켰다는 것도 실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기생의 長은 「行首기생」이며 인물이 뛰어난 고을 기생은 보통 사또의 「守廳妓」로 뽑혔다.
「고려가요」전승자인 고려기생 못지 않게 조선조 妓生중에도 時調漢詩의 작가로서 國文學史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간 사람이 적지않다. 특히 그중에서 松都의 黃眞伊와 扶安의 李梅窓은 오늘날 詩婢가 세워질 정도로 뛰어난 女流詩人들이다. 더욱이 황진이는 名唱에 미모까지 갖춰 스스로 「松都三絶」의 하나라 자부했다.
山은 옛山이로되 물은 옛물 아니로다 / 주야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쏘냐 / 人傑도 물과 같아 /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의 시조다. 「路柳牆花」에 비유되는 천한 여인이지만 人生을 바라보는 그 깊숙한 눈길은 어느 철학자 못지않게 諦觀에 차 있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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