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는 산문과 어떻게 다른가
ㅡ이향아
발레리는, '詩를 무용이요, 산문은 보행이다'라고 하였으며, 사르트르는 詩를 총알이 없는 총신에, 산문을 장전된 총에 각각 비유하였다.
또 리이드는 詩를 색이 있는 유리창이라고 한다면 산문은 투명한 유리창이라고 하였다. 이들 비유는 모두 詩가 쾌락의 문학이며 비실용성의 문학이라고 규정하면서 산문은 교시적 문학인 동시에 일상성의 문학이라고 빗대어 말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시와 산문을 구분하는 요건은 많다. 우선 똑같은 내용의 생각일지라도 시 정신으로 파악된 것인가 아니면 산문정신으로 파악된 것인가에 따라서 시와 산문이 나누어진다. 시가 느낌으로 표현되며 설명이 필요하지 않은데 대하여 산문은 묘사로써 서술되고 설명되는 것이 다르다.
시의 언어는 주관적인 표현을 필요로 하지만, 산문의 언어는 객관적인 서술을 필요로 한다. 산문은 시처럼 주관적이고 토막 난 언어로는 성립될 수 없다. 시가 생략을 지향하여 이심전심을 기대하는데 반해서, 산문은 지나친 생략으로는 완전한 전달이 되지 않는 형식이다. 시는 생략 가운에서 비약과 확대가 허용되지만 산문은 표현되지 않은 것은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시가 노래라고 한다면 산문은 이야기이다. 노래에서 기대하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즐거움이지만 이야기에서 기대하는 것은 의미가 연결되는 줄거리인 것이다. 또 시는 언어의 배열과 형식적 배려가 필수적인데 대해 산문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러한 표현상의 특징을 지적하여 趙芝薰은, '詩는 실로 主觀의 究極에서 찾은 客觀이요, 散文은 客觀의 究極에서 찾은 主觀'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런 뜻에서 보면 시야말로 진실한 심정의 리얼리즘이요, 소설이야말로 허구적 진실의 로맨티시즘'이라고 말하였다.
즉 위의 말은 시로 표현할 때 오히려 그 용량에 신축성이 있으며, 산문으로 표현할 때 오히려 제약성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설명과 서술을 거부하고 言外言으로 완성하는 시의 직관성에서 심정의 리얼리즘을 발견할 수 있음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한 편의 詩를 읽고 나서 우리가 얻는 것은 일시의 정신적 만족이며 이 정신적 만족을 우리는 달리 감동이라고 하기도 하고 미적 쾌락이라고 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과 한 알을 먹을 때, 사과의 맛을 즐기려고 먹게 되는가, 아니면 사과의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한 목적으로 먹게 되는가 하는 질문은 곧 시의 쾌락적 기능과 교훈적 기능을 묻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맛을 취하여 먹게 되는 음식도 있을 것이고 영양분을 섭취하기 위하여 먹게 되는 음식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그것이 유해하다면 먹지 않게 되며 아무리 영양분이 많다 하여도 그 맛이 쓰고 맵거나 아리다면 그것은 음식으로서보다 약으로서 먹어야 될 것이다. 詩가 맛으로 먹는 음식에 해당된다면 산문은 영양분으로 먹는 음식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詩를 보자.
그대 눈 속에 강물 소리치고
하루하루가 흐르고
바람 불고 꽃이 피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흘러간다.
온갖 맵시 곱고 예쁜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와 얼굴 비춘다.
내 손을 팔목까지 그대 눈 속에 담그고
그대의 입과 턱 언저리를 바라볼까
한가한 구름 한 조각이
그대 눈 속 노을에 묻히고 있다
흥얼거리며 입술 핥고 있다
- 서원동 <그대의 눈> 전문 -
위의 작품이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필요불가결의 것이 아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으로 '그대'가 있는 공간의 표현에 불과하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세월이 지나가는 그대의 눈, '온갖 맵시 곱고 예쁜 새들이 떼를 지어 날아'오는 그대의 눈은 나의 전 세계이며 천국이다. '내 손을 팔목까지 그대의 눈 속에 담그고' 그대를 바라보고 싶어 하는 화자는 그대에게 경건하게 헌신하는 예배자와도 같다. 이러한 세계에 증오가 있을 수 없고 술수나 권모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시인은 그러한 자신의 정서를 여러 모로 그려 보였을 뿐, 그 밖의 다른 의지나 사상, 혹은 정보나 지식을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시가 산문과 확실히 다른 점은 시는 정서를 표현하고 산문은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시를 살펴보면 더욱 확연해진다. 동시는 동시이기 때문에 미숙한 어린애들의 지적 성장을 저해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명분 있는 규제가 따르게 된다.
산너머 저쪽엔
별똥이 많겠지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졌으니.
산너머 저쪽엔
바다가 있겠지
여름내 은하수가
흘러갔으니.
- 이문구 <산너머 저쪽> -
위의 詩에서 어린이들이 습득할 만한 새로운 지식이라든지 정보는 아무 것도 없다. 오히려 경험적 사실과 멀고 더구나 학식과는 동떨어진 비과학적인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동시가 '별똥'이라고 하는 유성의 존재에 대해서, 그리고 '은하수'라고 하는 천체계의 星群에 대해서 어린 독자들을 오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 詩는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有害한 것일까? 혹시 그렇다고 말할 사람이 있을는지도 모른다. 만일 있다면, 그는 詩가 제공하는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우리의 현실 생활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너머 마을로 별똥별이 밤마다 서너 개씩 떨어지는 것을 목격한 어린이가 산너머 마을을 동경하는 것은 無知가 아니라, 理想이요 포부다. 아이는 자라서 떨어진 유년의 별을 찾아 세계를 걸어갈 것이다.
현대의 과도한 물질문명 속에서 길들여진 현대인들이 더러 실리적이며 근시적인 안목으로 판단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詩는 사실과 유리된 환상의 세계로서 현실의 생활과 직접 관계가 없으며 더구나 의식주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다. 詩에 접근함으로써 현실세계에 대한 방어력이 없어진다고 생각을 한다면 그것은 그 발상부터가 지나치게 근시안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위의 詩가 어린이들에게 제공하는 아름다운 정서와 신선하고 순진한 상상력은 인간의 성장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될 것이다. 인간 정서 속의 동경과 꿈, 온정과 기원은 인간에게 감추어진 가공할만한 가능성을 개방하고 잠재능력을 유도해 내는 동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성인의 세계라고 하여 무시되는 것이 아니다.
별들은 연기를 뿜고
달은 폭음을 내며 날아요
그야 내가 미쳤죠
아주 우주적인 공포예요
어둠이 촛불에 몸 씻듯이
깊은 밤 속에 잠겨 있으면
귀 밝아오노니
지하수 같은 울음소리.....
- 정현종 <심야통화 3> -
상상력의 폭이 다를 뿐이다. 시인은 심야에 올려다보는 희부연 하늘, 과속하는 세계 속에서 달도 폭음을 내며 질주하는 듯한 '우주적인 공포'에 시달린다. 그러면서 시인은 '그야 내가 미쳤죠.'라고 자탄한다. 그러나 '내가 미쳤죠.'라고 하는 이 시의 화자는 정말 자신을 미쳤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아니다. 미쳤다고 말할 다른 사람의 비판에 앞서 자신을 그렇게 비판하는 척했을 뿐이다.
깊은 밤 속에 잠겨 있을 때 '지하수 같은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 이것은 詩의 아름다움을 알고 詩의 즐거움을 알고, 그래서 詩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에게만 열려 있는 특별하고도 아름다운 은총인 것이다.
이리하여 시인은 닫혀진 공간과 제한된 시간 속에서 불행하게 살지 않고, 공간적으로는 무한을, 시간적으로는 영원을 꿈꾸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꿈꾼다는 것은 공소하고 허황된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이상세계의 추구를 의미하는 것이다.
출처: http://poet.co.kr/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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