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살의 독신남 시인 ‘유진닐’에게는 10여 년 전부터 알게 된 서울의 여자 친구 그니가 있다. 본디 그녀의 이름은 유근희였는데 근희야, 근희야… 하다가 부르기 좋게 <그니>가 되어 그렇게 불렀다.
그녀 자신도 근희라는 흔한 이름보다는, 고상하고 이국적인 뉘앙스가 호젖하게 풍기는 그니라는 호칭을 좋아했다. 둘이서 더러 술집에서 대취大醉하는 날에는 그니라는 발음이 잘 안되어 <그지, 거지, 고니, 꼬니>라고도 부른다. 그 날은 모름지기 팔 다리가 실컷 꼬집히는 날이다.
그들이 서로 알게 된 것은 10여 년 전 서울에서 문학활동을 할 때 였는데 지금껏 서로 트러블 한 번 없이 잘 지내고 있다. 술집에서 술을 먹다가 술값이 없거나 차비가 떨어지는 날이면 다짜고짜 불러내도 싫은 표정 하나 없이 나타나 해결해주곤 한다.
“짜샤-- 돈 좀 갖고 다녀라. 시골 촌놈이 서울이 어디라고 돈 없이 술을 퍼 마시냐. 쨔샤--”
하고는 지갑 속의 빳빳한 지폐로 성큼 해결해주곤 한다. 그렇다고 이들이 서로 뜨거운 사이라거나 보통 이상의 사이는 절대 아니다.
그저 서로 언제이고 적당한 시간에 연락만 되면 만나 차를 마시며, 술을 즐기며 세상사는 이야기, 인생 살아가는 이야기, 문화계 이야기 등, 잡다한 얘기의 꽃을 피우는 대화의 벗이요, 술의 벗이요, 이 시대 삶의 동반자일 뿐이다. 그니는 편하게도 유진닐을 만나면 담배도 피우고 그니의 주량(소주는 1명, 막걸리는 2되)만큼 기탄없이 마시며 어울려 준다.
그니는 그리 예쁜편도, 미운편도 아니고 그저 두리뭉실하며 포근한 맏며느리감이다. 소탈하며 지적知的인 언행하며 합리적인 사고력은 유진닐을 비롯,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는 매력이 있는 여인이다.
서울 Y대학을 나와 잠시 교편을 잡았는데 한 때 어느 남자와 열애를 하다가 결혼 직전에 퇴짜를 맞았단다. 이유는 결혼혼수와 패물이 없는 가난한 선생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엎친데 덮친다는 격으로 사업을 하던 아버지마저 실패하시고 울화병으로 돌아 가셨단다.
그 후. 그니는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나와 독신아파트를 하나 얻어 살면서 잡지사 번역일이나 교정료 등을 받아가며 혼자 살기 시작했다. 그러기를 벌써 10년째로 30대의 독신여인이 되어 버렸고 평생을 그렇게 산단다. 그런 그니는 실연의 아픔을, 고독과 좌절, 낭만과 자괴감 등을 스스로 태우며 살고 있다.
이 시대의 밝은 곳과, 어두운 지대의 명암을 가슴에 안고 유약한 여인으로, 세상의 명예와 재물, 시류時流에 초연하는 이 시대의 독신여인이 되어 버렸다.
그니가 술만 취하면 눈시울을 붉히며 읋조리는 시가 있다. 프랑스 유명한 시인 ‘아폴리네르’의 ‘미라보 다리’이다. 이런 날은 그니와 유진닐은 인생과 세상에 대취大醉하는 날이다.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흘러내린다.
내 마음 속에 깊이 아로 새기리
기쁨은 언제나 괴로움에 이어옴을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손에 손을 맞잡고 얼굴을 마주보면
우리네 팔 아래 다리 밑으로
영원의 눈길을 한 지친 물살이
저렇듯이 천천히 흘러 내린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사랑은 흘러간다 이 물결처럼
우리네 사랑도 흘러만 간다.
어찌면 삶이란 이다지도 지루한가.
희망이란 왜 이렇게 격렬한가.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나날은 흘러가고 달도 흐르고
지나간 세월도 흘러만 간다.
우리네 사랑은 오지 않는데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은 흐른다.
밤이여 오라 종아 울려라.
세월은 가고 나는 머문다.
얼마 전 유진닐이 서울에 가서도 예외없이 그니를 무교동 낙지골목으로 불러내 만났다. 그 날도 둘이는 쐐주 1병과 낙지를 시켜놓고 술을 마셨다. 마치 돈이 지상 최고의 목표이듯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 같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수족처럼, 접시 위의 낙지는 꿈틀꿈틀 미치도록 요동하였다. 유진닐은 그러면 그럴수록 먹어 없애야 한다며 손으로 우겨 잡고 입에 집어넣고, 그니는 가슴에 들여 태워야 한다며 입가에 달라붙은 낙지 발을 손으로 떼며 우겨 넣었다.
술을 몇 잔 마신 그니는 시무룩해 한다. 아까부터 밝지 못한 표정을 보며 물었다.
“그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그니 말 해봐, 나 한테 뭐 비밀있나?”
“태웠어 그것을.”
“뭘 태워?”
“어찌보면 우습기도 하고, 호호호 호호호.”
그니는 붉은 메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의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얼굴을 붉히더니 씽긋 웃었다.
“어어, 웃기는 그니?”
“내가 나쁜 애지 뭐. 태우다 못해 그걸 태웠으니.”
“그니, 정말 애간장 태울거야?”
그니는 주위를 힐끗 보더니 얘기를 실실 털어 놓는다.
어느 날 잡지사에서 번역료를 받아 편집장과 기분이 좋게 한 잔 걸치고는 집으로 터벅터벅 들어갔다. 평소에도 반기는 애견 치와와가 그 날도 예외없이 방 마루에서 꼬리치며 그니를 반기더란다. 방으로 들어가자 침대 곁으로 따라오더니 버릇처럼 앉더란다.
그런데 이 치와와는 암놈이 아니고 수놈으로, 앉기만 하면 그놈의 음경이 보기 흉하게 쑤욱(!) 나온단다. 다른 짓은 다 예쁘고 귀여운데 꼭, 앉을 때마다 뒷다리 사이로 붉은 색을 띠며 쑤욱 나오는 음경의 귀두를 볼 때마다 독신녀인 그니로서는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단다. 그것도 혼자 있을 때라면 모르겠는데 누구 손님이 왔을 때 그러고 앉으면 여간 민망한 일이 아니었다.
그 날도 그니는 치와와가 그짓을 하고 앉아 있자, 술 한 잔 한김에 옆에 있는 라이타 불을 최대치로 올리고 음경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에이구, 세상에 그것 좀 안 나왔으면 살겠다 살겠어!”
그러자 사고는 순식간에 나버렸다. 털로만 덮혀 있는 귀여운 치와와가 불덩이에 휩싸여 깨갱대는 것이 아닌가! 그니는 술이 확 깨었다. 얼떨결에 바가지에 물을 떠다 끼얹었으나 치와와는 비 맞은 생쥐 모양으로 오돌오돌 떨면서 한쪽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연신 신음 소리를 내었다.
다음날, 이웃에서 알세라, 시장바구니에 몰래 담아 가까운 가축병원에 갔다. 화상 원인을 묻는 수의사한테 그니는 사실대로 말했다.
“아니, 태울 게 따로 있지 세상에, 그 중요한 것을 태워요 글세.”
“……….”
음경 주위는 빨갛게 익어 진물이 나오고 치와와는 죽을 듯이 오돌오돌 떨며 소리를 쳤다.
집으로 돌아온 치와와는 그렇게 며칠 앓다가 기어이 죽었다. 그니는 그렇게 아꼈던 유일한 집안의 식구였는데 그렇게 되었다며 며칠 동안 밥 생각도 없이 눈물을 흘렸단다. 요즈음은 그나마 적적하던 독신여인 집이 더욱 을씨년스럽다며 우울하단다. 그러면서 그니는 제안했다.
“유 선생, 오늘 우리 집에 가자구. 적적하다 못해 무서워서 그래 응?”
“뭐, 뭐야. 이젠 내 것(?)을 태우려고!”
“어머머 . . . . . . ?”
“. . . . .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