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국립병원 공원 소나무 밑에 있는 그의 시비는 마치 그가 누워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그곳에서 그의 몸에 새겨진듯한 시,
보리피리
/시인
한하운
보리 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 ㅡ ㄹ 닐니리
보리 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 ㅡ ㄹ 닐니리
*****
집필 의도 및 감상
한하운(韓何雲)은 평생을 천형병(天刑病)인 나병으로 고생하다 죽은 시인이다. 가혹한 운명에 몸부림치며 사람으로부터 멸시를 당하고 자기의 비통과 울분과 절망적인 한의 고통을 시를 통해 극복하고자 했다. 성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은 정상적인 사람에 대한 투쟁이나 저항이 아닌, 아름다운 정서와 낭만적인 시상을 통해 승화되고 있다.
1953년에 발표한 시 <보리 피리>는 유년 시절에 불던 보리 피리에 대한 추억을 통해 어릴 적에 대한 향수와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그 그리움은 단순히 지나간 과거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라, 성한 인간이 되고 싶다는 동경, 인간 틈에 끼어 인간 대접을 받으며 정상적인 생활로 회복하고 싶다는 소망을 뜻한다.
이 시는 민요적인 가락으로 음악적인 효과가 잘 살아 있다. 그래서 작곡가 조념(趙念)씨의 작곡으로 발표되어 많은 사람들의 애창(愛唱)을 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이 시의 애잔하게 흐르는 보리 피리 소리는 방랑 생활에서 겪은 괴로움과 좌절감을 달래고 정화시키는 구실을 하며, 쳄?자아가 자기의 존재론적 한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행위라 하겠다.
시어 및 구절 풀이
보리 피리 불며 ㅡ ‘보리 피리’는 보릿대를 잘라 만든 피리로, 시적 자아가 유년 시절의 고향과 인간사에 대한 그리움을 떠올리게 하는 매개체의 구실을 한다.
봄 언덕 / 고향 그리워 ㅡ 시적 자아가 보리 피리를 불면 어린 시절 봄 언덕과 고향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떠오른다. 이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고향의 모습 자체에 대한 그리움이라기보다, 나병에 걸리기 전 정상적인 자기 얼굴 모습에 대한 그리움이라고 보아야 하겠다.
피ㅡㄹ 닐니리 ㅡ 보리 피리를 불 때 나는 소리로, 그 가락에는 한과 슬픔이 서려 있다.
꽃 청산(靑山) / 어린 때 그리워 ㅡ ‘청산’을 통해 시적 자아의 어린 시절이 아름다운 이상적인 시절이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지금 시적 자아는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그때를 그리워하고 있다.
인환(人寰)의 거리 ㅡ ‘인환(人寰)’은 사람들이 살고 북적대는 곳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환(人寰)의 거리’는 정상적인 인간들이 사는 세계를 말한다.
인간사(人間事) 그리워 ㅡ 한과 비극을 지닌 나병 환자로서의 시적 화자가 정상인이 되어 살고 싶다는 열망이 잘 나타나 있다.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ㅡ ‘기산하(幾山河)’는 ‘산하가 얼마냐’란 뜻으로, 시적 자아가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전국 곳곳을 방랑하며 떠돌아 다닌 지가 몇 해런가라는 한과 자조(自嘲)가 섞인 스스로에게 묻는 하소연이다.
눈물의 언덕을 지나 ㅡ 방랑 생활의 서러움을 단적으로 나타낸 구절로, 나병 환자로 체험한 방랑 생활의 슬픔과 한이 짙게 스며 있다. 시적 자아가 그 모든 고통을 인내하고 극복하며 살아왔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
그의 시는 아름다워서 읽은 것이 아니라 그의 시가 아파하는 것을 나도 아파하고 싶어서 읽었다.
그 아픔을 나도 아파하고 나면 속이 시원하게 풀렸다.
내가 걸어다니는 길은 모두 한하운의 <황톳길>처럼 여겨졌다.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바닷가의 길도 한하운 이 닦아놓은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이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天安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西山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속으로 쩔룸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긴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千里 먼 全羅道길
-<全羅道 길> 전문
《韓何雲詩抄》에 있는 시 25편 중 <全羅道 길> <손가락 한 마디> <罰> <목숨> <데모> <파랑새> <꼬오 ·스톱> <나> <봄> <女人>등, 이 열 편은 나를 울음의 도가니에서 꺼내놓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외로운 도가니 같은 섬에서 섬으로 떠돌게 되었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정말로 아니 올시다
사람이 아니 올시다
짐승이 아니 올시다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옷 돋아난
버섯이올시다 버섯이올시다
다만 버섯처럼 어쩔 수 없는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목숨이올시다
億劫을 두고 나눠도 나눠도
그래도 많이 남을 罰이올시다 罰이올시다.
-<나>전문
그리고 이런 땐 나도 죽고 싶었다.
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季節 앞에서
겨웁도록 울다 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
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
한번밖에 없는 自殺을 아끼는 것이요
-<봄>중에서
그리고 <女人>에서는 나도 나의 여인을 생각했다. 모두 잃고 나면 모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만 남아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 <황톳길>을 걷고 있다.
눈 여겨 낯익은 듯한 女人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나리고 내 옆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 살 남직한 저 女人은
뒷모양 걸음걸이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
어쩌면 엷은 입술 혀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감길 듯 떠오르는 追憶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女人>전문
그는 갔지만 그의 시집은 내 곁을 떠나지 않는다.
이제 그도 그의 시집도 말은 하지 않지만 그의 시집을 열면 숱한 이야기들이 눈물로 번진다.
그런 때 나는 걷던 길을 멈추고 발밑에 있는 민들레랑 실컷 울어버린다.(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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