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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문예/나은 김우영작가

기생과 성문화

매트메니저 2007. 5. 24. 18:55

노년층과 마주 앉으면 명기(名妓)열전과 권번(券番)문화라 할 명월관(明月館) 이야기 같은 걸 자주 듣게 된다. 이젠 그 제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들의 화제는 회고조로 들릴 뿐이다. 기생이란 통념상 술자리에서 손님 시중을 드는 여인을 뜻하며 그 기원에 대해선 정확한 기록이 없는 듯하다. 하지만 삼국시대부터 접대부, 작부(酌婦), 주모(酒母) 따위는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기생은 고려 때 교방(敎坊)에서 출발한 것으로 그것이 조선조 중반에 와서 하나의 제도로 자리를 굳혔다. 그 시대엔 관기(官妓)라는 걸 두었는데 그 대상은 정적(政敵)의 아녀자와 서민을 노비로 삼는 일이 허다했다.


하지만 이 기생도 격이 있어 세 패(牌)로 분류, 1패는 전통가무의 전승자로 행세했는데 이는 상류 급을 말한다. 이들은 시작(詩作)뿐 아니라 ‘고려가요’를 전승한 공로자기도 했다. 이 무렵 등장한 대표적 기생으론 황진이(黃眞伊)와 이매창(李梅窓), 그리고 김부용(金芙容)을 들 수 있다. 그 다음 2패는 술집에서 시중을 들며 밀매음을 하는 부류이고 3패는 그야말로 내놓은 공창(公娼)이었다. 이들 기생 중 정상에 속하는 황진이, 이매창, 김부용은 시와 가무에 뛰어나 선비와 묵객, 토호, 활량들의 표적이었을 뿐 아니라 문학사에 각인된 인물로 꼽힌다.



논개와 남강서 죽은 적장


기생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우리의 가슴 속에 살아 숨 쉬는 기생 중에는 의기(義妓) 논개(論介)같은 인물도 있었다.

▲ 우선 황진이

부터 짚어보자. 명기 황진이는 벽계수와의 그 애절한 사랑을 노래한 장본인으로 본명은 진(眞)이다. 그녀는 출중한 용모와 시와 서, 가무로 선비들을 매혹시켰으며 더욱 유명한 건 고승 지족선사(知足禪師)를 유혹 파계(破戒) 시킨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벽계수’를 향해 애정을 품었던 탓에 세련된 시구로 ‘청산리 벽계수야 쉬이 감을 자랑마라’의 명시를 남겼다.  우리의 문학사에 길이 남을 ‘산은 예산이로되’, ‘어져 내일이여’ 등은 오늘날에도 문학도들이 애송하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를 받는다.


▲ 논개(論介)는 의기로 전북 덕유산 자락 장수군 계내면 주촌 마을 출생으로 현재 장수읍 두산리에는 그녀를 기리는 의암사(義巖詞)와 진주 촉석루 서편에는 영정과 위패가 있는 의기사(義妓詞)가 있다. 논개의 성은 주(朱)씨로 당시 그 지방 선비 주달문의 딸로 천한 신분이 아님에도 기생이 된 데엔 까닭이 있었다. 주달문이 죽자 그의 삼촌이 논개를 세도가에 팔아 넘겨 피신하던 중 붙들려 현감 최경희의 문초를 받는 과정에서 논개의 인간됨됨이에 감동, 현감과 인연을 맺기에 이르렀다.


그 후 현감이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 부임했다가 임진란을 맞아 전투에서 전사를 했고 그 때 왜군들의 승전잔치를 벌이는데 논개가 징발 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논개는 술 취한 적장을 유인,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생을 마친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거에도 불구, 사당을 짓는데 일각에서 이를 반대하자 주민들과 전투를 치른 장졸들이 들고 일어나 사당을 건립, 해마다 성대하게 추모잔치를 벌여 왔다. 그럼 논개로부터 목숨을 빼앗긴 적장은 누구인가. 그는 가토(加藤淸正)의 오른 팔 검술의 명인, 에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라는 자였다. 그 자는 조선침략에 공을 세웠지만 적국의 미녀한테 죽임을 당했다 해서 무덤도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은 흘러 일본 규슈(九州) 유지들이 진주의 흙을 파다가 그의 고향 산마루에 묻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천안의 김부용 묘


같은 조선 중엽의 명기 김부용의 묘는 현재 천안시 태화산 광덕사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그 묘옆에는 운초, 김부용 지묘(雲楚 金芙容之墓)라는 비가 보인다. 부용은 원래 평안도 성천 태생으로 10세때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비롯 당서(唐書)까지 익혔으나 그 무렵 양친과 사별, 12세 때 기적(妓籍)에 올라 가무에 천재성을 발휘, 15세 때 명기 반열에 올라 선비와 토호, 활량들의 귀여움을 산다. 그 무렵 성천 사도가 새로 부임, 부용의 재능과 미모에 반해 그녀를 측근에 두질 않고 평양감사 ‘김이양’에게 소개했으나 덕망 높은 감사는 이를 거절했다.


77세인 감사는 자신의 나이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평소 그의 명성을 들어왔던 부용은 이렇게 나왔다. “세상에는 30대 노인도 있고 80객 청춘도 있는 법이니 굳이 나이를 따질 일이 아니옵니다.” 이렇게 해서 받아들여져 생활을 하던 중 김이양이 호조판서로 승진, 한양으로 떠났다. 이 때 부용을 기적에서 파내어 양민으로 만들어 놓고는 정식 부실(室)로 삼고 내일을 기약하며 한양으로 향했다. 하지만 한 동안 소식이 오질 않자 무용이 가슴을 조아리며 썼다는 ‘부용상사곡’ 보탑시(寶塔詩)는 그래서 더욱 유명하다.


이별을 하옵니다. (別)

그립습니다. (思)

길은 멀고 (路遠)

생각은 님께 있으나 (念在被)

몸은 이곳에 머뭅니다. (身留慈)

비단수건은 눈물로 젖었건만 (紗巾有淚)

가까이 모실 날은 기약이 없습니다.(雁書無期) (이하 생략)


격조 높은 언어로 다듬은 이 시는 그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경지의 것으로 꼽힌다. 그 후 김이양은 부용을 불러 한양에서 편하게 살다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 때 김대감은 92세로 선영이 있는 천안에 내려와 60회방(回榜) 잔치를 치르고 나서 죽는다. 남자 구실을 못하는 77세 노인을 30대 젊은 여인이 그토록 사랑하며 평생을 보냈다는 건 기생으로선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것은 형이상(形而上)의 몸짓이며 문학용어로 플라토닉 러브(Platonic Love)라 한다면 지나치다 할 것인가. 김부용은 하지만 오늘에 와서 결코 외롭지 않다. 그의 시를 연구하고 애송하는 문학도와 독자가 있는 한 그러할 것이다. 또 천안에선 그녀를 추모하는 행사를 30년간 거르지 않고 거행해 왔다. 안수환(교수·시인), 유지 김성열 등 문인과 천안 문화원(원장 권연옥)이 앞장을 섰다.



전쟁과 性문화


조선조 때 절정을 이뤘던 기생문화가 1900년대 일제가 들어오며 그 조직이 권번(券番)으로 바뀌었다. 권번에선 춤과 노래, 술자리 접대방법 등을 가르쳐 고급요정으로 배출을 했다. 전국 대도시엔 관(館)이라는 게 간판을 걸었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서울의 ‘명월관(明月館)’을 들 수 있다. 거기에는 총독부관리와 친일 벼슬아치[男爵, 子爵]그리고 토호, 때론 일부 일본유학생들이 출입을 했다. 그곳에선 조선민요와 때론 일본의 ‘엔카(演歌)’ 따위를 불렀다. 이 무렵 전국적으로 기생조합까지 조직했는데 만세운동 때는 전국주요도시에서 기생들이 그 선봉에 나선 일까지 있다.


일본본토에선 기생을 ‘게이샤(藝者)’라 부르는데 이 역시 가무에 능한 자들로 악기는 주로 ‘샤미셍(三味線)’이 따라 붙는다. 일인 특유의 애조를 띤 가락은 그들 생활 속에 배어있었다. ‘샤미셍’은 일본이 자랑하는 연희 가부키(歌舞伎)와 깊은 연관을 갖는 악기였다. 8·15해방을 맞자 자유물결 앞에 권번과 기생문화, 일본의 잔재 ‘엔카’는 사라졌으나 대전 GI문화가 고개를 들며 세상을 뒤흔들었다. 그 후 6·25전쟁이 발발, 국토의 폐허로 국민들은 기아와 실의로 보기 흉한 성(性)문화 쪽으로 기울기도 했다. 전쟁의 후유증에 시달린 건 비단 한국만은 아니었고 선진국들도 그것을 여과 없이 체험했다.


유엔군 즉 주둔지엔 으레 기지촌(基地村 )이라는 게 있어 매음행위가 독버섯처럼 일어났다. 태평양 전쟁당시 있었던 ‘종군위안부’사건은 오늘에까지 두고두고 우리 국민의 가슴을 짓누르고 당사자들은 아직도 객혈(喀血)하듯 피울음을 토하고 있다. 전쟁은 모든 것(운명)을 예측불가능한 쪽으로 몰고 가며 역사를 뒤바꿔 놓는다.  6·25전쟁 때 서울 성동구, 용산구, 종로구 등지엔 ‘군위안대’라는 게 있어 플래카드를 내걸고 외출, 휴가 중인 군인들을 끌어들였다. 휴전 이후 그것이 자취를 감춰버렸으나 그 여파는 적선지대(赤線地帶) 사창가로 변모했다. 전국 주요도시엔 그것이 들어서 대전에도 ‘중동 10번지’라는 게 있어 70년대까지 주야불문 호객행위를 하는 걸 본이가 한 둘이 아닐 것이다.



문학작품에도 그것이


일제 때 ‘종군위안부’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와 소설이 허다하지만 ‘월남전’에서의 한국군의 기지촌 실태, 6·25의 ‘종군위안부 대열’, 유엔군기지촌을 다룬 작품 또한 한 둘이 아니다. 가슴 아픈 우리의 그 상흔은 이쯤에서 접고 외국의 전쟁작품 예를 들기로 한다. 저 유명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전쟁을 피해 제3지대로 가는 ‘무기여 잘 있거라’, ‘태양은 또 다시 떠오른다’, 태평양 전쟁을 그린 영화 ‘도라도라도라’, ‘콰이강의 다리’, ‘두 여인’ 등 이루다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 모두 명작들이지만 이중 ‘25時’ 역시 큰 감동을 안겨주는 신부 ‘게오르규’의 소설이다. 주인공(착해빠진)이 전쟁이 끝나 고향간이역에 내리자 아내가 두 애를 끌어안고 마중 나왔다. 전쟁 중 관헌한테 낳은 또 하나의 애, 그것은 남의 자식이다. 여기서 울지도 웃지도 못하고 일그러진 표정을 짓는 주인공…. 전쟁이란 이렇듯 선량한 자의 운명을 여지없이 짓밟고 바꿔놓는다. 그것은 룰(법칙)에서 벗어난 무법자로 ‘25時 ’요, 5계절인 동시에 ‘제8요일’이란 걸 은유한다. 하나만 더 늘어놓자. ‘미니소설’을 ‘콩트’라 이르는데 문학사에 길이 남을 콩트요, 짧기로 유명한 ‘독일군이 남겨 놓은 것’ 그 작품 말이다. ― 전쟁은 끝났다. 병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초저녁 어느 마을 입구에 다다르자 홍등가 추녀 밑에서 분 냄새를 풍기는 여인이 앞을 가로 막으며 “쉬었다 가세요!” 이렇게 유인한다. 가까이 다가서 마주 보다 “앗!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소스라쳐 뒤로 물러섰다.  -


한두 자 문맥에 오류가 있을지 몰라도 줄거리는 이렇다. 소설 습작시절 여러 번 읽었던 콩트다. 전쟁을 치르고 돌아와 보니 아내는 이미 창녀로 변신해 있더라는 기막힌 내용이다. 전쟁으로 또는 식민지하에서 겪어야 했던 그 아픈 상흔을 되 뇌이기 싫어 이렇듯 남의 작품으로 대입(代入)해 본 셈이다.  역사는 흘러 세상은 변해있고 가치와 윤리관도 크게 달라져 있다. 평등과 여권신장으로 이제 기생은 존재치 않으며 작부와 공창제도도 없어진 지 오래다. 고급요정엔 작부 아닌 어엿한 가정주부, 일반 음식점엔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활기 있게 일한다. 열녀니 수절이니 하는 이야기가 되레 생소하게 들리는 세상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섹스란 비익(秘匿)하는 게 아니라 ‘게임’쯤으로 생각하는 세상이다. 하지만 옛것이라 할지라도 장점은 소중하게 생각하는 쪽으로 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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