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 한일 전기매트 온수매트 제조 도소매

♡━━ 문학 문예/나은 김우영작가

재원 기생

매트메니저 2007. 5. 24. 18:54

미모와 재원을 갖춘 기생

낭만과 풍류를 알았던 휴매니즘의 그들



                                           작가 김우영



   기녀. 일명 기생은 봉건사회가 낳은 일종의 사치노예일수도 있다.사치노예인 점에 있어서는 궁녀도 마찬가지지만 궁녀와 기녀는 일반의 인식도 그렇고 그 신분에서 오는 모든 여건이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이다. 기(妓)는 원래 비(婢)와 같은 부류로 신라 김유신이 젊었을 때 사권 천관녀(天官女)도 천관녀사의 사비이다.사비는 사노와 더불어 민간에 시주를 받으러 다니는 과정에서 유녀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오늘날 남아 있는 고구려 무통가 벽화속에 남녀가 손목에 한삼을 끼고 춤추는 장면을 보더라도 고구려 때 이미 직업적인 광대와 유녀가 있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한편 이웃나라 문헌에도 고구려 유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관기제도는 고려때 확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락지(藥志) 등에 나오는 이름과 각 도에서 뽑아올린 기생들과 성중관기(城中官妓)들로 구성된 것이 바로 그것을 뒷받침한다.

  11세기 문종때 팔관회(八關會)나 연등회(燃燈會)같은 국가적 행사때 처음으로 여악(女樂)을 썼다하니 국문학사상 주옥같은 고려가요의 전도자는 바로 기녀인 셈이다.

 

 

  조선조가 고려의 관기제를 이어받은 것은 물론이다.관기는 경기(京妓)와 고을기(地方妓)로 나누어지며 경기(京妓)의 전성시대는 연산군때이다. 전국에서 자색있고 재주있는 소녀들을 뽑아올려 연평(運平)이라 불렀다. 연산군 10년이후에는 그 수가 3백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지방기는 감영 부(府) 색목(色牧)현( 縣)마다 정수(定數)가 있었다. 최하 현에는 20명에서 최고 평양 감영의 2백명까지 전국적으로 그 수는 경기(京妓)까지 합해 3만명을 헤아렸다고 하니 놀라만한 일이다.京妓는 그후 2백명 가량으로 줄어 관중(官中) 내의원( 內醫院) 일명 약방 소속 80명과 공조(工曹)상의원(尙衣院)에서 바느질을 맡은 금침비 1백50명 등 모두 2백여명 정도였다.

 

 

   “약방기생”은 침술을 배웠기 때문에 평소에는 궁중에서 간호사 혹은 조산원 노릇을 하지만 국가적 잔치(進晏進豊呈같은)때는 기생으로 바뀐다.

  기생의 정년은 50세이며 딸이나 조카딸을 대신 들여놓고 물러나야 한다. 이것을 대기정속(大妃定屬)이라고 한다. 기생은노비(奴婢)와 같이 한 번 기안(妓案)에 기록되면 빼주기전까지는 천형(天刑)과 같은 신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춘향이 변사또에게 반항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솜털도 안가신 16세 소년 이몽룡이 부모 몰래 춘향을 속신시켰다는 것도 실제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기생의 장(長)은 행수(行首)기생이며 인물이 뛰어난 고을 기생은 보통 사또의 수청기(守廳妓)로 뽑혔다.

   “고려가요”전승자인 고려기생 못지 않게 조선조 기생중에도 시조한시 작가로서 국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기고 간 사람이 적지않다. 특히 그 중에서도  송도(松都), 황진이(黃眞伊)와 전북 부안의 이매방(李梅窓)은 오늘날 시비가 세워질 정도로 뛰어난 여류시인들이다. 더욱이 황진이는 명창에 미모까지 갖춰 스스로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라 자부했다.

 

 

  “山은 옛山이로되 물은 옛물 아니로다 / 주야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쏘냐 / 人傑도 물과 같아 / 가고 아니 오노매라”

 

 

  황진이의 시조다. 자연과 人生을 바라보는 그 깊숙한 눈길은 어느 철학자 못지않게 달관의 경지에 오른듯 하다.


(다음호에)

'♡━━ 문학 문예 > 나은 김우영작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생과 성문화  (0) 2007.05.24
[스크랩] 재원 기생  (0) 2007.05.24
[스크랩] 공창 유곽  (0) 2007.05.24
공창 유곽  (0) 2007.05.24
[스크랩] 기녀를 찾아서  (0) 2007.0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