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시대의 ‘슬픈 유산’ 公娼
개항 이후 일본서 유입…
제2차 대전 중엔 ‘정신대’로 깊은 상처 남겨
작가 김우영
일제 통치는 한국 근현대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여럿 남겨 놀았다. 그중 여성의 처지에서 보면 공창(公娼)의 도입과 이로 인한 매매춘의 확산도 일제가 남긴 폐해의 하나로 지적할 수 있다.
한반도에 매춘을 전업으로 하는 오늘날의 매춘부가 들어온 것은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일본인이 들어오면서부터.
유곽이 처음 생긴 곳은 부산이었다. 1902년 7월 일본인 거류지 바로 옆에 문을 연 ‘미도리마치’(綠町․현재의 완월동)가 시조다. 이어 인천, 원산, 서울, 대구, 청진, 목포, 대전 등지로 번졌다. 한일합병이 되던 1910년에는 11개 이상의 도시에 유곽이 들어섰다. 1910년 창기(娼妓)의 수는 일본인 851명, 한국인 569명으로 일본인이 다수를 차지했으며, 5년 후에는 일본인 3713명, 한인 1271명으로 급속히 팽창했다.
1920년대에는 백인 매춘부도 등장했다. 1922년 12월 30일자 동아일보는 ‘로서아추업부래성(露西亞醜業婦來城)이란 제하의 기사 아래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명의 러시아 20대 여성이 들어왔다”고 보도했다.
1920년대 사창가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창가에서 볼 수 있는 쇼윈도 구조로 돼 있었다. 당시에는 이를 ‘장점’(張店)으로 불렀는데, 도로에서 투시할 수 없게 건물구조를 지정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얼굴을 보이고 손님을 끌어들이는 것은 풍기상 좋지 못하고 아무리 창기라도 온갖 조롱을 받는 것은 인도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1921년 7월 이를 폐지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장점 폐지를 철회하라는 포주들과의 실랑이 끝에 타협으로 나온 것이 실물 대신 사진을 걸어놓는 것. 이 타협책은 같은 해 9월부터 일제히 시행에 들어갔다.
공창에서도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명암은 엇갈렸다. 1929년 한 햇동안 유곽을 찾은 유객수와 유흥비 총액을 총기 수로 나누어보면, 일본인 창기들은 매일 0.7명의 유객을 상대해 5원47전을 번 반면, 조선 창기는 0.2인을 받아 87전을 벌었다. 일본 매춘부들이 상대적으로 부유한 일본인들을 상대한 반면, 조선 매춘부들은 사회 하층의 노동자들을 주로 상대할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구타와 질병에 시달리고, ‘인육’ ‘썩어진 고기덩이’ 등으로 불리며 천대당해야 했다. 학대에 견디다 못해 삭발 파업을 하거나 자살하는 여성들도 속출했다. 1931년에는 청진의 창기 12명 중 11명이 아사동맹(餓死同盟)을 맺어 단식 투쟁에 들어갔다는 사실이 기사로 소개되기도 했다.
미 군정 폐지령으로 해방 뒤 사라져
이런 가운데도 조선인 창기 수는 급격히 늘었다. 1차 세계대전 등으로 인한 불경기로 생활고가 극에 달하자 매춘을 택하는 조선 여성들이 많아졌다. 1925년 2805명이던 조선의 창기와 작부 수는 1931년도에는 무려 5073명으로 급증했다. 반면 일본인은 4085명에서 4361명으로 소폭 증가에 그쳤다. 조선 여자들의 사회적 빈곤과 실업이 얼마나 심각하였나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 창기들의 처참한 생활상에 분개한 사회단체들이 공창 폐지 운동을 펴기도 했다. 공창 폐지 기성회, 혁청단, 근우회, 각 지역 청년단체 등이 공창 폐지를 주장하고 서명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폐창 운동을 근본적으로 성공할 수 없었다. 1935년 1월 1일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유곽밖 출입을 허용키로 한 것이 폐창 운동이 이룬 작은 결실이었다. 총독부는 공창도 통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독립운동가나 공산주의자들이 유곽을 은신처로 삼고 있다고 판단, 주기적으로 무장 경관까지 동원해가며 유곽 수색을 벌였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위안부란 이름으로 공창이 공급됐다. 8․15종전 당시 30만의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해 있었는데, 그때까지 주둔지에는 모두 큰 유곽이 설치돼 있었다. 중일전쟁 당시 육군오락소 문앞에는 ‘성전(聖戰)의 용사 대환영’ ‘몸도 마음도 모두 바치는 충성스런 일본 여성의 서비스’ 등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일제의 공창은 태평양전쟁 중이던 1944년 정신대란 이름으로 악명을 더했다. 조선 여성 7만~8만명이 전선에서 참혹한 대접을 받으며 위안부 생활을 했다. 일본의 일부 우익 관료들이 “정신대는 공창이므로 한국인 차별이 아니었다”는 발언을 서슴지 않고 있지만, 한국 여성 대부분이 강제 연행당했다는 점에서 망언에 불과할 뿐이다. 공창 제도는 해방후 미 군정의 공창폐지령에 의해 비로소 사라졌다.
(다음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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