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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풀든 시인이 충남일보에 나오기 시작해요. 축하해요

매트메니저 2007. 5. 14. 17:06

[연재] 대흥동 연가

 

 

제6장 대흥동으로 (53) 대흥동에 돌아오다

 

 

김우영 작가, cndnews@naver.co.kr

등록일: 2007-05-13 오후 7:49:29

그류는 문득 대흥동이 그리웠다. 물론 어느 날이고 정들었던 대흥동을 잊은 날은 없지만 기왕에 출가한 방랑의 몸인지라 가급적 방랑의 갈에서 만나 사유(思惟)의 강(江)에서 만난 그것들과 함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대흥동 품이 그리워 우덜로 문화한마당에 연락을 취했다. 우덜로의 늘 풀든 시인이 반갑게 전화를 받는다.
“어허, 그류 선생님. 한동안 연락이 안되어 걱정했어요. 얼른 돌아오세요. 요즘 대흥동이 뜨거워요. 중구청과 중구문화원에서 대흥동 야외무대에서 매주 토요 어울 마당이란 주제로 정기공연을 시작했어요. 어서 오시어 함께 해요”
“허허허--- 그래요.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어요?”
“그럼요 어서 돌아와요”
“내 그러지 뭐. 대흥동이 그립기도 허니 말이야. 내 가지요”
그류는 한산장 안에 있는 한산 집이란 대포 집에 들어 막걸리 한 순배를 마셨다. 쉰 김치에 두부를 싸서 마시는 술맛이 일품이다.
시원한 막걸리를 홀짝 마시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버스정류장으로 향하였다.
늘 느끼는 바 이지만 정류장 근처에는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모퉁이 하나씩 들고 오가는 저들의 바지 끝에서 실한 삶의 흔적이 옹기종기 매달린 듯 했다.
정류장에 도착하여 서천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탔다. 대전을 가려면 서천으로 가서 버스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한산 돼지고개를 넘어 기산 영모리 옆을 스치니 안내판이 보인다. 고려말 대학자요, 문신 학자 삼은(三隱)중의 한 사람이다. 이 나라 대학자 목은 이색 선생의 유지를 기리기 위해 세운 문헌서원이다.
이색은 정방 폐지, 3년 상을 제도화하고 김구용·정몽주 등과 강론, 성리학 발전에 공헌했다. 우왕의 사부였다. 위화도 회군 후 창(昌)을 즉위시켜 이성계를 억제하려 했다. 조선 태조가 한산백에 책봉했으나 사양했다고 전하는 올곧은 선비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서천읍 삼거리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대전에 가는 버스시간표를 보니 금방 버스를 탈 수 있었다. 잠시 화장실에 다녀와 터미널 옆 허름한 벤치에 앉아 담배를 한 대 피웠다.
그러는 사이 대전행 버스가 도착한다. 그류는 버스에 성큼 올라탔다. 버스는 많은 승객들로 붐볐다. 뒤쪽 빈자리에 앉아 차창을 보았다. 저만치 들녘에 해오라기 한 마리 사뿐이 즈려앉는다. 버스를 큰 몸체를 기우뚱하고 움직이더니 이내 서천 버스터미널을 빠져나와 시가지를 벗어난다.
그류를 태운 버스는 도토리묵으로 유명한 판교리를 지나 부여군 경계인 옥산고개를 넘어 홍산을 향하고 있었다. 떠남과 돌아옴, 삶의 죽음, 사회와 세상 등 온갖 것을 생각하며 차창에 눈을 응시하며 그류는 생각에 잠겼다.
홀연히 나와 사회 세상에 대하여 스스로 몸을 던져 알 필요가 있다는 자의식에 사로잡혀 대흥동을 떠난 지 몇 달 만에 대흥동으로 향하고 있는 그류. 이렇게 행사는 길 위에 인생이 과연 그류가 살고자 하는 방향타와 맞는지 생각해본다.
덜컹거리며 달리던 버스는 논산을 거쳐 벌써 대전 서부터미널에 도착하고 있었다. 산성동에 도착한 그류는 가까운 그린파워로 발길을 옮기고 있었다.
이곳은 우덜로 문화한마당을 함께하고 있는 늘 풀든 시인이 운영하고 있는 사업장이다. 그류가 없던 대흥동의 그간 사정을 알고 싶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