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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 문예/나은 김우영작가

우리가 문학을 하는 이유

매트메니저 2008. 1. 4. 05:25
 

       

      우리가 문학을 하는 이유는?


                                          나은 길벗


강원도 춘천에서 화천으로 이사 간 소설가 이외수 선생님을 만난지는 지난 청바지와 스카프, 장발의 문학시절(文靑)이었다. 처음 만난 그는 첫 마디가 이랬다.


“난 가난해서 글을 썼어요. 작가는 한 자루의 붓과 종이만 있으면 가능하지만 음악가나 화가는 돈이 많아야 배우는 예술분야이잖아요.”


오늘은 새벽에 눈이 부스스 떠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간 밀린 숙제(원고쓰기)를 해야겠다며 노트북 앞에 앉았다.

얼마 전 원고청탁을 해온 시집평론과 독후감 원고 더미를 쌓아놓고 한 편, 한 편 정성스럽게 읽어 내려갔다. 신선감과 해맑은 원고의 내음에서 힘찬 에너지를 맛본다. 때 묻지 않은 이들의 원고에서 밝은 문학의 미래를 본다. 평론과 독후감 심사평을 다 쓰니 이른 아침 6시가 되었다.

늘 하는 버릇처럼 전국과 세계 각지에서 날아오는 이메일(2,000여명 관리)을 검색하고 나의 문학카페와 홈 페이지를 두루 돌아다니고는 직장으로 출근했다.

무려 4시간 원고를 쓴 이 작업을 경제적 환산가치로 따져보면 큰 돈은 아니다. 그러나 중학교 시절 무심코 시작한 습작의 세월이 오늘날 중견작가가 되었고 이 일이 이렇게나마 약간의 돈이 될 줄은 몰랐다.

물론 일반적인 경제활동 하는 것에 비하며 아주 적은 금액이지만 내가 새벽잠에 깨어나 노력하여 번 돈 치고는 삼겹살에 쐐주 한 잔은 족히 마실법한 실실한 금액이다.

아내와 주변으로부터 돈에 대한 짜증 어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이렇게 자조적인 말을 종종 한다.


“에이 괜시리 작가를 했네. 차라리 사업이나 할 것을 . . . ?”


그러나 이런 창작을 하면서 약간의 돈이 들어오면 보람스런 작가가 되길 잘 했구나. 하고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저 유명한 법정스님은 그의 어록에서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사람이나 사물은 끝없이 형성되고 변하는 것이다. 선입견을 벗어나 맑고 깨끗한 ‘열린 눈’으로 생각과 내 눈을 열면 세상도 열리는 법이다!”


우리나라는 프랑스나 영국처럼 문인들이 글만 쓰면서 먹고 살기는 어려운 곳이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글을 쓰면서 별도의 직업을 가지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통계로 보면 우리나라 4천8백만명 인구중에 문인은 약 3만여명 정도라고 한다. 이 가운데에 반은 한국문협이나 국제펜클럽 같은 협회에 등록된 이른바 ‘호적에 올린 문인’이고 반은 문학동인회나 일반문인들에 속한다.

전국 3만여명의 문인중에 글만 쓰는 전업문인은 1%인 3백여명 정도 되는데 이 중에 글만 써서 먹고 살 수 있는 사람은 1백여명 안쪽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른바 유명작가나 베스트셀러 작가들이 이들이다.

전체문인 3만여명 중에 현재 가지고 있는 직업을 내놓으면 먹고 살기가 힘들고, 글만 쓰자니 먹고 살기가 힘든 작가가 약 1천여명 미만인데 내가 이 중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또 5천여명은 직업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글을 쓰긴 하지만 어쩌다 한편씩 쓰고 문협 세미나나 모임에 가끔 얼굴을 내미는 정도이다. 스스로 시인이나 작가임을 자족하는 부류이다.

그리고 1만5천여명 정도는 가뭄에 콩 나듯 어쩌다가 글을 쓰거나 말거나 하는 정도이다.

나머지 1만5천여명 정도는 문단에 어떤 이유로 문단에 등단만했지 작가활동이 거의 없거나 이름만 올려놓고 저 세상으로 가는 부류의 문인들이다.

나도 마음 같아서는 평생을 좋은글과 책과 만나며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신선처럼 살골 싶다만 어찌 세상일이 내 마음대로 될까?

개인적으로 시인이나 작가는 자기만의 독특한 작가관과 아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편의 시를 쓰기 위해 몇 날을 고민하며 지새우든가, 아니면 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전국을 두루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는 등 작가만의 끼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신과 자기 생명력이 뚜렷한 신념있는 시인, 작가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문학을 자기의 직장과 사업상으로 이용하거나 출세, 명예의 도구로 사용하면 안된다. 위선과 허위로 덮힌 그런 문학은 설사 우선 보기에 좋을지 몰라도 생명력이 짧고 어느 시기가 되면 정지가 된다. 이른바 뜻있는 선비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문인(文人) 이전에 인간이 먼저 되어야 한다! 시를 좀 알았다고 하여 거만하고 명예나 재물이 있다하여 자만해서는 안된다!”


벼가 익으면 고개가 숙여진다는데 오히려 오만과 거만 위선과 거짓에 둘러쌓여 있으면 안된다. 이런 사람이 하는 문학이나 예술은 감동 이전에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철학자 ‘윌리엄 서머싯’은 말했다.


“예술가는 고독한 늑대이다. 동료가 그를 황야에 내쫓는 것은 그를 위해서 좋은 일이다. 자기만족은 예술가를 멸망시키는 것이다.”

쥐가 천정을 갉아먹는 처절한 고독과 얼음같은 찬 서리의 외로움을 모르고 무슨 글을 쓰랴? 머리로 글을 쓰는 문인 이전에 가슴 따스한 마음으로 글을 쓰는 참된 문인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그리하여 난 늘 고독한 실존적 에고이스트(egoist)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문학을 왜 할까?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명예가 되는 것도 아니요,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않는 외롭고 힘든 고행(苦行)의 길이다.

애로라지 거칠고 험한 이 세상을 한 자루 등불처럼 어둠을 밝히며 아름답고 살만한 사회로 가꾸어 가는데 그 씨앗이 되자고 하는 것 아닌가?

자신이 파논 구렁텅이에서 자만에 빠져 세상을 우습게 알거나, 문학을 자기 과시나 악세사리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은 이미 문학이(文學人)나 예술가(藝術家)가 아니다. 저자거리의 패거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문학을 하면서 적어도 아래처럼 살아서는 안된다.


1. 사회적 약속이나 언행에 신의가 없는 사람

2. 문학을 자기 목적이나 이기주의 도구로 치부하는 사람

3. 문인(선비)이전에 인간이 덜 된 사람


참된 예술은 손끝이나 눈 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고른 마음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태양은 도덕적하지도, 부도덕하지도 않다. 그는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는 어둠을 정복한다. 문학도 그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1989년 3회 추천으로 한국문단에 등단하고 20여권의 책을 냈다. 이런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나는 투사도 아니고 더더욱 파시즘(fascism)주의자도 아니다. 가급적 타협하고 원만하게 대인관계를 풀어나가려고 한다. 그러나 인간성 부재(不在)와 문재(文才)가 없어 길이 안보이는 사람을 한동안 지켜본다. 그러다가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조언을 하다가 도저히 이게 아니다 싶으면 피해 나간다.

바쁘고 갈 길이 먼 인생의 여정에서 되지못한 부류들과 어울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대저 어느 학자는 이렇게 말 했다.

“험난한 세상을 살다보면 여러 부류의 사람들을 만난다. 나에게 거울이 되지못한 사람은 가급적 피해 나가라. 그들과 시름할 시간이 있다면 경전을 한 번 더 읽으라.”


그간 문단을 통하여 여러 사람을 만났다. 몇 년 만나다 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가 보인다. 한동안은 눈에 뭐가 덮혀 보이질 않았는데 차츰 이런 저런 일을 하면서 그 사람의 인격이 보인다.


나는 가급적이면 원만하며 합리적인 동그라미의 순리를 지키며 살려고 한다. 물론 어떤 때는 고집스럽고 나은만의 카리스마가 있다고 주변에서 말들을 한다. 그래서 난 정말 고독한 실존적 에고이스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단 등단 20여년에 책 20여권을 내며 외롭고 힘든 작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그 정도의 패기나 배짱이 없으면 현재의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는가?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국제펜클럽을 비롯하여 내가 운영하는 한국해외문화교류회, 계간 문예마을과 문학세상, 한국농촌문학회, 중구문학회 운영과 각종 문학작품 심사위원, 작품평론 등 벅차고 복잡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스스로 자문하는 자괴감에도 빠진다.

참된 예술가는 끼가 우선이고 개성이 있어야하며 독특한 성격이 있기에 그 힘든 창작과 여로의 길을 간다. 어떤이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이 세상에 나쁜 사람은 없어.”

“아니야 선천적으로 나쁜 사람이 있어. 거짓말을 물 먹듯하다가는 사람을 죽여 땅에 묻는 그런 사람들 . . .!”


나의 눈을 통하여 세상을 아름답고 바라보면 좋은 것이고 천국이다. 모르겠다 내가 좀 더 성숙하여 철학적 도를 익히면 나아질는지 . . .


문학(文學)이란 삶에서 오는 갈등의 해결방식이며, 간접적인 삶의 고백이다. 모든 작가들이 생존하고 투쟁하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얘기와 자신이 안고 있는 모든 고뇌를 들려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도달한 최고, 최상의 감성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 인간 활동이다. 독일의 시인 괴에테는 말 했다.


“하늘에는 별이 있고 땅에는 꽃이 있고 인간의 가슴에는 따스한 사랑이 있다!”


또 철학자 칸트도 말했다.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둘이 있는데 하나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이요, 또 하나는 자신의 가슴속에 있는 도덕이다.”

꽃을 주는 것은 자연이고 그 꽃을 엮어 화환을 만드는 것은 예술이라고 했다. 마치 태양이 꽃을 물들이는 것과 같이 문학은 우리 인생을 고독하게 하면서도 아름답게 살만한 가치를 부여하는 붉은 이상(理想)의 현실이다.

이래서 우리는 문학을 하는 것이다. 오늘도 그 잘난 글, 그 못난 글을 위해서 말이다. 오, 참으로 고약한 애물단지의 문학(文學)이여!  


          무자년 새해 새벽에 부스스 눈을 뜨며


                  못난 놤자 나은 쓰다


- 추위야 네가 아무리 추워봐라. 내가 옷 사 입나? 차라리 술이나 한 잔 사 먹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