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한국농업 위기와 돌파구
(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李羲錫<한국영농신문 발행인․편집인>
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쌀은 학명(學名)으로 오리자 사티바(Oryza Sativa)이다.
발상지가 인도 기원설, 동남아 기원설, 중국 기원설, 운남고원 기원설 등이 있으나 7천여년전 선사시대 중국 양자강 이남 영파와 항주지역의 하모도(河姆渡) 문화유적지에서 재배되었던 흔적이 지금까지로는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그무렵부터 쌀은 농경문화의 중심을 차지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 벼농사가 도입돼 쌀을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현재까지의 탄화미(炭化米) 발굴 결과에 의하면 4천4백여년전 남한강 여주평야 또는 해주(海州)와 전라도 영산강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일부 학계에서는 남방계 쌀이 북방을 거쳐 한반도에 도입된 것으로 주장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중국 영파지역으로부터 직접 유입되었다는 남방 전래설이 유력해 지고 있다.
그로부터 쌀은 우리 겨레의 삶 그 자체였다. 1년 24절기의 세시풍속 자체가 벼농사였고 우리 겨레가 사는 곳에는 어느 곳이든 벼농사가 있었고 겨레가 이동한 곳에는 언제나 벼농사가 함께 따라 다녔다. 강가에도 해변에도 심지어 산골짜기에도 다락논을 일구어 공동으로 벼를 심고 가꾸어 쌀을 생산해 왔다. 벼(쌀)농사는 바로 가족과 마을과 사회와국가 및 사직(社稷)의 기둥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쌀은 우리의 주식(主食)으로써 민족의 혼과 맥이 함께하는 산업으로써 우리는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며 신앙처럼 여겨왔다.
그러한 쌀(벼)농사가 오늘에 이르러 한순간에 무너져 내릴듯한 위기의 벼랑끝에 서 있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지난 1993년 12월 우여곡절 끝에 타결된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 결과 회원국들은 국제가격과 국내가격의 차이만큼 관세를 부과하는 조건으로 농산물 시장을 개방하고 관세수준을 순차적으로 낮추기로 합의했음을 상기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쌀은 그 중요성과 어려운 상황을 인정받아 수출국으로부터 일정량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한다는 조건으로 UR(우루과이라운드) 기본원칙인 ‘예외없는 관세화’를 2004년까지 10년동안 특별하게 유예받아 그 10년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UR이후 설립된 WTO(세계무역기구)가 지난 1일 농산물 수출보조금 지급금지와 수입 농산물에 대한 관세경감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도하개발아젠다(DDA)의 기본골격안을 1백47개 회원국 만장일치 합의안으로 승인함에 따라 지난해 9월이후 소강상태에 빠졌던 DDA협상은 다음달부터 재개될 예정이다. 그러나 이번 합의는 구체적 내용은 추후 협상으로 넘긴 채 말 그대로 골격에만 합의하는 형식을 취해 향후 세부원칙 협상에서 국가간 및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그룹간 이해 다툼이 더욱 치열해 질 것으로 보는 전문가들이 많다.
◇‘관세화냐 관세 유예냐’를 떠나 쌀 개방은 가깝게 다가오고 있다
올해 관세 유예기간이 만료되는 우리나라는 UR농업협정문 부속서 제5의 규정에 따라 내년부터는 의무적으로 관세화를 하든지 관세화 유에를 선택해야할 기로에 서 있다. 우리나라가 지난 1월 협상개시 의사를 통보한 이후 미국․중국․태국․호주․인도 등 9개국이 쌀 협상 참가 의사를 표시해와 현재 협상이 진행중에 있다. 이들 나라와의 양자 협상은 지난 5월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오는 9월말까지는 모든 양자협상의 합의 결과를 세계무역기구(WTO)에 통보해야 한다.
정부는 쌀 협상에서 ‘관세화 유예’ 조건이 우리에게 최대한 유리하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입장이며 국내 쌀 산업에 대한 영향을 최소화한다는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만일 우리 정부의 입장이 관철돼 ‘관세화 유예’가 되었다고 볼 때 합의된 의무 수량양만을 반드시 수입하면 되므로 연도별 쌀 수입의 예측이 쉬운 반면 ‘관세화 유예’ 대가로 의무 수입량의 증량, 민간 수입 허용 등 상대방의 지나친 요구에 직면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을 맞게 될 것이다.
또 관세화 유예 기간 중 관세 감축이 없으나 언젠가 맞이하게 될 관세화 단계에서 그때까지의 스케줄을 반영한 감축률을 한꺼번에 적용받게 되므로 장기적으로 조정 비용이 클 것으로 사료된다.
반면 관세화 때에는 높은 수준의 관세를 부과할 수 있고 지나친 의무 수입량 증량을 피할 수 있겠지만 국제가격 변동에 따라 국내시장의 불안전성이 커질 수 도 있다. 이렇게 볼 때 ‘관세화 유예’로 결정되든 ‘관세화’로 결정되든 간에 UR 농업 협정문 부속서 5의 규정을 보면 쌀 수입량은 더 늘어날 전망이어서 쌀 수입개방은 가깝게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케 될 것이다.
쌀 협상에서 ‘관세화 유예’를 연장 받으려면 이해 당사국에 추가적이고 수용 가능한 양허를 제공해야 하는데 즉 2004년의 20만 4천톤보다 최소한 더 많은 양의 쌀을 의무적으로 수입해 한다. 또 관세화로 갈 경우에도 현행의 쌀 의무 수입량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관세 부과 후 쌀 수입이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관세화’가 유리한 지 ‘관세화 유예’가 유리한지의 판단은 단기적으로 볼 때 어느 경우든 국내 쌀산업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이 적은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관세화 유예’ 연장에 따라 의무 수입 물량방식으로 국내에 유입되는 쌀 수입량의 크기가 ‘관세화’시 예상되는 쌀 수입량의 크기보다 적을 경우 ‘관세화 유예’가 유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관세화 유예’기간 종료때 예상되는 갑작스런 경 착륙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또한 쌀 소비량이 줄어들고 재고량이 늘어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할 때 꼭 ‘관세화 유예’만이 최상의 방안인지는 한번쯤 재고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 쌀개방 절망할 일만은 아니다
현재 우리나라 도시민중에서 우리가 먹는 식탁위의 것들중 70%가 수입제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1995년부터 수입되기 시작한 쌀은 2004년에는 국내 생산량의 4%에 해당하는 20만4천톤을 최소시장 접근물량(MMA)으로 외국에서 의무수입해야 한다. 지금처럼 가공 원료곡으로만 전용된 최소 접근물량의 확대로 갈 것이냐, 아니면 관세화로 전환하여 수입해야 할 지는 앞에서 고찰해 본 봐와 같은 장․단점이 있다.
막연히 우리 쌀이 가격면에서 이웃 중국보다 5배이상 비싸기 때문에 경쟁력이 없다고 절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일 수도 있다. 협상력에 의하면 달라지겠지만 4백% 관세율과 유통비용까지 포함하면 경쟁할만하다는 전문가의 견해도 상당히 많다.
다행히도 웰빙(Well-being)문화가 최근 붐을 이루면서 우리 토종 농산물에 대한 구매력이 점차 증가되고 있다. 최근 어느 통계에 의하면 지난해 토종 유기농산물 매출은 전년에 비해 2배나 늘었다고 한다.
건강한, 안락한, 만족한(Well) 인생(Being)을 추구하는 삶을 일컫는 신조어는 건강한 생활과 마음의 여유를 함께 추구하는 생활을 뜻한다. 선진국에서는 웰빙(Well-being)을 21세기를 주도할 신(新) 소비 트랜드로 꼽고 있다.
지난해 공기 청정기 같은 소위 웰빙 가전제품은 60만대나 팔렸다고 한다.
토종과일로 만든 화장품, 검은콩우유, 감자라면, 현미라면 등 우리의 토종 농산물들은 웰빙(Well-being) 신조어의 바람을 타고 개방파고를 넘을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
쌀이 개방될 경우 막연히 경쟁이 안된다고 자포자기만 할 사안은 아닐 성 싶다. 우리 쌀이 국제 경쟁력을 가지고 생존할 수 있도록 제도적 노력을 강화해야 할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고품질 안전 농산물에 대한 관심이 웰빙 바람을 타고 커지고 있음을 감안할 때 수입쌀과 차별화되는 우리쌀의 고품질화 등이 실현될 경우 얼마든지 개방화를 극복할 것으로 보여진다. 실제 건강․기능성 식품은 그 효능 유무를 떠나 몇십만원 심지어 몇백만원을 호가해도 잘 팔리고 있기 때문에 비록 우리 쌀이 고가 일지라도 실제로 가계에 미치는 영향이 우리가 생각하는 만큼 크지 않았다. 우리 쌀이 고품질 안전성만 보장된다면 경쟁력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 우리 농업의 공익적 가치는 82조원
우리는 우리 농업의 평가를 농산물에 국한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것은 숲만 보고 나무는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 농업의 가치는 우리가 생각하는 농산물 그 이상이다. 중요한 공익기능을 수행하는가 하면 삶을 윤택하게 만드는 역할도 한다. 이런 것들은 아직까지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농업의 공익적 가치는 홍수를 조절하고 대기와 수질을 정화할 뿐 아니라 녹지와 휴양처를 제공하는 등 연 82조5천억원에 이른다. 눈에 띄지 않지만 농산물 생산액의 4배에 달하는 엄청난 혜택을 국민들에게 베풀고 있다. 혹자는 싼 농산물을 외국에서 사다 먹는 것이 더 이익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렇듯 막대한 공익기능의 혜택을 전혀 생각해 보지 않고 하는 말이다.
선진국에서는 농업의 의미를 환경과 국토보존의 역할까지로 확대해 재평가하고 있다. 농업(Agriculture)을 천연자원관리(Natural Resources Management) 혹은 자연관리(Natural Management)라고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선진국에서는 환경보존․국토보존 등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중시하며 농업을 농작물을 생산하는 이외에 의미로 농업을 보호하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농업을 통해 환경을 보전하는 각종 정책을 추진하고 농촌의 존재를 통해 도시민이 얻는 유․무형의 이익을 그 제공자인 농민에게 보상하는 개념의 직접 지불제 등의 정책을 확대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연방정부 차원에서 토양침식의 감소, 농산물의 생산능력 보호, 수질향상, 야생동물 서식지 확보, 습지자원 확대 등을 위해 보전 유지 보호계획을 시행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는 중․산간지역에서 경작하는 전통적인 계단식 논․밭은 생산성은 떨어지지만 경관이 아름다워 2000년부터 정부가 나서 이들 농촌을 지원하기 시작했다.(중산간지역 직접지불제도)
EU의 경우 또한 농촌지역에서 최소한의 인구를 유지하고 아름다운 경관과 풍부한 농촌공간을 보존하고자 1975년부터 농촌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는다는 이유만으로 농가에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다(조건불리지역정책)
우리나라도 현재 ▲고령 농업인이 농업 경영을 이양하고 은퇴하는 경우 ▲친환경농업을 실천하는 경우 ▲논의 형상과 공익유지에 적합한 농지의 경우 등에 대해 직접보조금제를 일부 시행하고 있음은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재 우리 국민의 71.2%가 이런 직접 지원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 쌀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앞에서 잠깐 언급했지만 쌀은 5천년 우리 역사와 함께해온 삶 그 자체였고 신앙이었다. 볏짚방석에서 자고 일어나 메밥을 먹고 들판에 나가 제철에 맞춰 쌀 농사일을 행했다.
농업인들은 이러한 쌀을 생산하기 위해 여든 여덟 번의 정성어린 손이 가야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한자로 쌀은 ‘米’자로 쓰고 있다.
지금은 그런 일들을 전설로 받아드리지만 5.16혁명이전만 해도 해마다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 쌀밥에 고깃국 한 그릇 먹는 것이 평생소원이라고 말했던 사람들이 많았음을 기억한다.
옛날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어갈 때 대통에 쌀을 담아 귓가에 흔들면 목숨이 연명된다는 속신(俗信)을 믿은 때도 있었다. 그리고 생쌀을 먹으면 어머니가 죽고 흘린 밥알을 쥐나 새가 먹으면 어머니가 눈뜨고 죽는다는 속설(俗說)도 있었다. 또 서슬이 시퍼런 시어머니의 눈길에 밥티라도 수체구멍에 나갈라치면 호통 받던 며느리의 설움까지도 얼마 전까지 이어 내려온 풍속도 있었다.
죽음을 연명하기 위해 귓가에 쌀 담은 대통을 흔들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어머니의 죽음에 쌀 한 톨 밥 한 알의 유실을 대등시킨 속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고로 쌀은 우리 겨레의 번성과 사직의 안녕을 지켜준 업(業)이며 축복이라고 생각해 오기도 했다. 기름진 문적옥답을 물려받은 부지런한 후손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조상들의 피와 땀의 결과를 소중하게 받들고(孝) 그가 속한 지역사회의 전통과 문화를 사랑하며(公) 다음 세대의 미래를 걱정하는 국민(忠)이었다.
우리는 쌀이 모자라 배고품의 설움을 겪었다. 어느 때는 쌀이 모자라 분식장려운동을 폈고 도시락에 보리가 얼마나 섞였는지를 학교에서 조사했던 때도 있었다. 80년대 초에는 흉작이 들어 세계 11개국으로부터 1천7백68만석의 쌀을 수입해 굶주림을 면한 일도 있었다. 우리 민족의 애환이 담긴 쌀 어떻게 할 것인가.
옛날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곳간 열쇠로 권력이 이양되는 다툼이 있었던 때도 있었다. 우리의 주식(主食)인 쌀을 외국에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켜야 된다.
한마디로 쌀은 우리 국민의 피요, 살이며 혼이다. 그리고 우리 국민의 신앙이다. 농업인은 고품질, 안전성 높은 기능성 쌀을 생산해야겠고 소비자는 농업인이 생산한 우리 쌀을 믿고 애용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 농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돌파구가 마련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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