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김삿갓의 생애
1)출생
김삿갓은 1807년 (순조 7년, 정묘년 3월 13일생) 에 한강 북쪽 양주 회천면 회암리에서 아버지 김안근과 어머니 함평 이씨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형 김병하는 25세에 병사하고 아우 병호는 어려서 죽고 조부 김익순은 홍경래란 때 투항한 죄로 김삿갓의 나이 5세 때에 사형을 당했다.
2)성명
이름은 병연, 자는 성심, 호는 난고 속칭 김삿갓이라고 하는데 기록에 따라 김삿갓을 김립 (대동기문, 대동시선), 김사립(녹차집), 김대립(해장집), 김초모(하정집) 등 다양하다. 또 가명으로는 김란, 이명(호), 지상(자) 등의 기록이 보인다. (해장집)
한편, 김삿갓 행세를 했던 함경도 시인 함삼택과 김병연이 죽은 뒤에도 다녔다는 김병현(金秉玄,鉉) 이라는 이름은 가짜 김삿갓으로 판명되었다.
3)성장
김삿갓의 나이 다섯 살 때 즉 1811년 (순조 11년, 신미년) 11월에 홍경래가 서북 인물을 중용하지 않는 정부 방침에 분격하여 평안도 용강에서 반란을 일으켜 순식간에 가산, 박천, 태천 등지를 휩쓸고 선천으로 쳐들어 갔다. 이때 함흥 중군으로부터 선천 방어사로 전관한 김익순이 반란군에 투항했다. 그러나 다음해(임신년) 2월에 홍경래란이 평정되고 김익순은 3월 9일에 참형을 당하고 그 일가는 폐족이 되어 뿔뿔히 흩어졌다. 뒷날 김삿갓이 [난고평생시]에서 ‘머리털이 겨우 자랄 제 운명이 점점 기박하여 가문이 잿더미처럼 주저앉으니 상전이 벽해된다.’ 고 희고한 것이 바로 이 사건을 말하는 것이다.
여섯 살 난 김삿갓은 그의 형 병하와 함께 황해도 곡산 땅에 있는 노비 김성수 집에 피신해 있었다. 거기서 수 년간 어린 시절을 보내며 공부도 했다. 그 뒤 김익순의 죄가 자손에게는 참형죄가 사면되자 김병연은 본가에 돌아왔다.
그의 나이 20세 전후에는 시문은 물론 경서와 사적, 제자백가서에 통달한 야심만만한 젊은이가 되었다. 그러나 역적 홍경래에게 투항한 죄목으로 처형된 조부 김익순 때문에 김삿갓은 출세길이 막혀 버려 절망하고 고민하다가 집을 나가게 된다.
4)방랑
김삿갓은 자기의 할아버지 김익순이 역적이었다는 사실에 대한 괴로움과 이러한 사실이 세상에 알려짐으로써 부딪혀오는 멸시를 견딜 수 없어 집을 뛰쳐 나가게 된다. 이 때가 김립의 나이 21세, 장수 한씨와의 사이에 큰 아들 학균을 낳은 뒤였다. 이것이 김삿갓의 첫 번째 가출이 된다.
그는 신분을 철저히 숨기고 상경하여 권문자제와 교유하면서 그래도 어떤 출세의 길을 모색해 보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그는 북경 안응수의 문객으로 있으면서 사수 신석회와 그의 형 해장 신석우와 가까이 지냈다. 신석우는 1805년에서 1865년까지 살았던 인물로 여러 관직을 거쳐 예조 판서까지 지냈다. 또 그의 아우 신석회 역시 관직이 이조판서에 이르렀고 안응수도 공주반자(半刺) 등을 거쳐 고위 관직생활을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청년 신석우도 청년 김삿갓과 처음 만나는 순간 자기와 더불어 이야기 할 만한 상대라고 보았다. 그러나 김삿갓은 이들에게 빌붙어 입신 출세한다는 것도 폐족이 된 자신의 처지로는 도저히 불가능함을 뒤늦게 깨닫고 치유할 수 없는 깊은 좌절감을 느낀다. 여기서 김삿갓은 집을 떠난 지 2년만에 일단 우울한 귀향을 하게 된다. 이 무렵에 형 병하가 자식도 없이 죽는 바람에 김삿갓의 큰 아들 학균을 형에게 입양시키고 24세 때에 차남 익균을 낳게 하고 다시 집을 떠난다. 이웃의 멸시도 여전했지만 그보다도 김삿갓 스스로가 답답한 회한을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집을 나간 김삿갓은 죽을 때까지 살아서는 집에 돌아온 일이 없었다.
삿갓은 아마 이 무렵부터 썼던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일차 출가 때는 입신의 끈을 찾으려는 노력이었기 때문에 삿갓 같은 것을 쓰고 괴기한 행동을 했을 리 가 만무하기 때문이다. [해장집]에도 신석우가 김삿갓을 처음 만났을 때 삿갓을 쓰고 괴기한 행동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가 처음부터 그렇게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35년 이상 근 40년을 시문, 일화를 뿌리며 방방곡곡 유랑을 거듭하는 사이 그는 서민층에 있어서 거의 신화적 존재와 같은 변할 수 없는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5)사망
김삿갓이 가정을 버리고 방랑하는 동안 그의 어머니 함평 이씨가 화가 나서 충청도 결성, 자기 친정으로 가버렸다. 멀쩡하게 생 과부가 된 장수 황씨(김삿갓의 처) 는 어린아들 익균을 데리고 두메 산골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어둔리에서 온갖 고초를 겪는다. 익균이 장성함에 어머니를 위해서라도 아버지를 집으로 모셔 와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바람같은 소문을 뒤�아 다닌다. “영남 땅에서 유랑하더라” 혹은 “단천, 평양 등지에서 기생과 살림을 차렸다.” 는 별별 풍문이 들려오곤 했다.
마침내 익균이 아버지를 처음 만난 곳은 경북 안동에서였다. 몰라보게 장성한 아들을 상면하자 김삿갓은 무슨 까닭인지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밤 아들이 잠든 사이에 야반도주 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익균이 아버지를 만난 곳은 강원도 평강에서였다. 이번에는 아들에게 십리를 떨어진 곳으로 심부름은 시켜 놓고 그 사이에 또 도망쳐 버렸다. 세 번째로 익균이 아버지를 찾아 만난 곳은 전라도 익산군 여산에서였다. 김삿갓도 이번에는 할 수 없다는 듯 꼭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부자가 함께 길을 걷다가 수수밭머리에 와서 대변을 보겠다고 밭으로 들어가버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차마 용변하는 곳까지 따라가 지켜 볼 수는 없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자 익균이 삿갓 벗어놓은 쪽으로 가 보니 삿갓 만을 벗어 둔 채 그림자도 없이 또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익균이 아버지를 모시고 집으로 올 수 있었던 것은 살아 있는 아버지가 아닌 죽은 아버지 였다. 1863년 계해, 철종 14년 3월 29일 전라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익균은 아버지께로 달려가서 시신이나마 자기집 근처에 묻기 위하여 천리길을 모시고 와서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록에 모셨다고 한다. 이때가 김삿갓의 나이 59세, 한 많고 기구한 시인의 한 생애가 이렇게 끝났다.
2.김삿갓의 사상
김삿갓의 방랑 생활은 출발 동기부터 불평객과 반항아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것은 그가 가명(假名)을 김란(金란)이라 하고 난고(蘭皐) 외에 이명(而鳴)이라는 호(號)로 불리고 머리에 삿갓을 쓴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이명(而鳴)은 중국 서적 고문진보(古文眞寶)에 있는 불평이명(不平而鳴)이라는 문구에서 따온 것이다.
그의 불평과 반항은 계급적 몰락에서 오는 개인적 입장에서 시작되었으나 세월의 흐름과 함께 폭넓은 사회 경험을 함에 따라 세계관과 사회관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조선 왕조에 대해 은근히 반대의 감정을 표시한 것은 물론 봉건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으며
빈부의 차가 심한 사회적 불합리를 저주하고 양반 귀족들의 죄악과 불의, 거만, 허식을 증오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중년을 넘으면서 점점 더 심해졌다. 그의 사상에 이러한 변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폐족이라는 계급적 지위, 종의 집에서 자라난 유년 시기의 성장 과정, 또는 일생의 방랑 생활이 말해주는
불우한 사회적 처지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이유로 그가 살던 조선 말기의 사회 환경과 시대 특성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행한 사람과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깊은 동정을 표시하고 만인이 갈망하는 벼슬을 포기함과 동시에 당시 봉건 질서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된 그 사상과 태도 속에는 멸망과 붕괴에 직면한 민중들과 사회의 시대적 기운이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 정신과 풍자 정신이었으며 인도주의로 받침 되는 평민 사상이었다.
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개개 사물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적인 관심 등의 경향도 있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의의를 가지거나 중심 사상의 간접적이며 우회적인 표현에 불과하다.
그의 사상과 결부하여 몇 가지 특징을 말한다면
첫째, 이러한 사상 경향의 심도와 강도가 매우 철저하고 강렬했다.
일생 동안 방랑 생활을 하는 중 그의 아들이 세 번이나 찾아와서 귀가를 간청하였으나 끝까지 돌아가지 않은 점, 모친이 계신 외가가 있는 마을을 지날 때는 들러서 직접 만나지는 않고 산에 올라가 나무하러 온 아이들에게 안부를 묻고 갔다는 이야기, 친구 정현덕의 주선으로 왕의 사면을 받고 벼슬 받을 기회를 거절했다는 사실 등에서 그러한 특성을 볼 수 있다.
둘째, 사상 경향의 표현 방법과 형태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였다.
우선 방랑 생활 자체가 불평과 반항의 한 표현이었다. 그 이전의 많은 반항아들 역시 이 방법을 취했으니
생육신의 한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이 일생을 방랑객으로 지냈고 봉건 체제에 반항했던 허균(許筠)도 강원도, 경기도 등을 방랑하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하였다.
기이하고 광적(狂的)인 행동도 반항적 태도의 한 표현이었다.
황오(黃五)의 녹차집(綠此集)에는 '하루는 정현덕이 내게 편지를 보내 오기를 천하 기남자(奇男子)가 여기 있는데
한번 가 보지 않겠는가 하기에 같이 가 보니 과연 김삿갓이더라. 사람됨이 술을 좋아하고 광분하여 익살을 즐기며 시를 잘 짓고 취하면 가끔 통곡하면서도 평생 벼슬을 하지 않으니 과연 기인이더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석우는 해장집(海藏集)에서 '과거장에 들어가되 어떤 때는 수십 편을 짓고 나오고 어떤 때는 한편도 안 짓고 나오니 그 광태가 이와 같더라....과거장 밖의 술집에서도 그의 이름을 사랑하나 그 광태를 무서워하여 술을 모조리 먹어도 돈을 요구하지 않았다'라고 그의 기행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또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큰소리로 웃어주기도 하고 풍자와 재담으로 비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일부 양반들도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한편 즐겨 쓴 삿갓 역시 변형된 투쟁 무기였으니 보기 싫은 당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김삿갓은 조부를 탄핵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죄인이라기 보다는 봉건적인 지배 계급에 대한 반항아라는
사회 정치적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3.김삿갓에 대한 본 받을 점 및 결론
김삿갓(이하 김병연)은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모른 체 김익순을 탄핵하였다.
그리고 가명을 쓰고 호도 바꾸고 삿갓을 써 자신 스스로 속죄하기 위해 전국을 떠돌아
다녔다. 하지만 이 행동은 무조건 옳다고는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자신의 부모를 모시고
자식들을 잘 가르쳤다면 그게 더 나은 속죄였다고 할 수 있을텐데 무조건 출가하여
전국을 떠돈 것은 무조건 잘 했다고는 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속죄를 하기 위해 택한 방랑 생활이 자신의 가족들에게는 어떻게
영향이 갈 지를 조금 더 생각했었어야 했다.
한편 이런 김삿갓은 방랑생활을 함으로서 사람들에게 신화적인 존재가 되기도
했다. 그가 지나간 자리에는 주옥같은 시가 많았으며, 재치와 익살이 넘쳐난
세상을 비판한 내용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었다.
그의 시에는 조선시대에 대한 은근한 반대 사상이 어려 있었으며, 그것은 물론
봉건사회의 질서와 제도를 부정하는 태도를 취하였다고 할 수 있다.
빈부 격차가 심한 사회적 불합리와 양반 귀족들의 몰락을 증오 하였는데 이런 태도는
중년을 넘어서면서 더욱 심해졌다.
그의 세상에 대한 자세가 변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신분의 불평등, 방랑생활에서 보여주는 불우한 사회적 처지 등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사상에서 가장 중심적인 경향은 강한 의분과 정의감에 기초한 반항정신과 풍자정신이었던 평민 사상이었다. 이 외에 자유분방함, 노골적인 연애 감정, 낙천성과 풍부한 유머, 사물에 대한 실사구시적인 관심 등도 그의 경향 중 하나였다.
그는 또 상대방을 공격할 때는 큰소리로 웃어주기도 하고 풍자와 재담으로 비꼬기도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취하였다. 이것은 일반 대중이 그와 그의 예술을 사랑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일부 양반들도 그를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었다. 한편 즐겨 쓴 삿갓 역시 변형된 투쟁 무기였으니 보기 싫은 당시 사회와 세상에 대한 불평 불만의 사상적 표현이었다. 김삿갓은
조부를 탄핵하고 스스로 세상을 등진 죄인이라기 보단 봉건적인 지배계급에 대한 반항아라는 사회 정치적 각도에서 이해되었으면 어떨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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